1998년 8월 3일 밤부터 4일 낮까지 중부지방에 내린 집중폭우로 중부권 곳곳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다. 대전과 충청지역 일부에서는 100mm에 달하는 집중폭우가 쏟아지면서 농경지가 침수되거나 주택이 반파되는 등 재산피해가 났다.
이어 8일 기습호우의 긴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엄청난 비구름대를 동반한 태풍 `오토`가 서해안에 접근했다. 1998년 8월 8일 오후부터 9일 새벽사이 태안과 당진, 천안 등지에 시간당 100mm의 폭우가 내려 8명이 숨지고 가옥 1724채와 농경지 1만 2000여㏊가 침수됐으며 국도와 지방도 10여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는 군인 13명과 미군 2명을 포함 사망 164명과 실종 70여명 등 총 230여명의 인명피해를 냈고, 8만 1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에 충청남도재해대책본부와 소방본부, 향토산단인 육군 32사단, 한국통신 충남본부 등에서는 인명피해가 큰 당진지역을 중심으로 응급복구에 나섰다. 당시 충남 소방본부는 소방관 등 인력 488명과 소방차와 동력펌프 등 장비 109대를 동원해 인명구조 및 침수지역 복구작업에 나섰다. 육군 32사단은 홍성과 예산, 태안 등지에 병력을 투입해 도로 등 복구작업을 전개했으며, 한국통신은 당진과 아산지역에 130명을 투입해 전단된 통신회선을 복구했다. 당시 중앙재해대책본부가 추산한 전국 피해액만 사상 최대규모인 1조원에 달했다.
기록적인 물난리에 `IMF`라는 악재가 겹친 한반도에는 수재민돕기 성금의 모금결과도 냉담했다. 대한적십자사가 수재민돕기 모금을 시작한 첫날인 7일 모인 성금은 22만 원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또 경제구조가 극도로 취약해져 있는 상태애서 맞닥뜨린 기록적인 폭우는 경제전망까지 어둡게 했다. 당시 경제전문가들은 농작물피해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두자릿수로 올려놓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등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 이른마 3대 거시지표가 정부에서 제시한 목표에 크게 미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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