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SS 광학표준센터 이동훈 책임연구원
KRISS 광학표준센터 이동훈 책임연구원
독일에서 공부할 때 같은 대학원 연구팀에서 함께 있었던 교수님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물리학을 전공하신 이 독일인 교수님은 20여 년 전 나의 학위논문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고, 올해 70세를 바라보지만 아직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신다. 약 10년 전 학술대회에서 잠시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계기를 통해서 내 고향 부산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 7월 9일부터 일주일간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국제마술연맹(FISM) 세계마술(魔術)챔피언십에 그 교수님이 마술사로 참가한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같은 분야에서 연구하는 선배 과학자가 아니라 마술사로서 부산을 찾은 교수님을 마주한 순간, 오랜 시간과 먼 거리를 넘어선 반가움보다 낯선 이력에 대한 궁금함과 신비감이 앞섰다. "마술사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요?" 알고 보니 교수님은 이미 30대부터 취미로 마술을 연마하며 여러 공연 무대에도 올랐고 동료 마술사들과 함께 독일과 유럽의 경연대회들도 자주 참가했다고 한다. 이번 세계대회는 동갑내기 마술 동료의 젊은 아들이 참가했는데 그를 지원하기 위한 코치 역할로 셋이서 한 팀을 이루어 부산을 찾은 것이라 한다. 세계마술대회 경연에 참가하는 것은 올림픽과 같이 각 대륙 예선을 거쳐서 일정한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고 하니, 이미 70세에 이른 두 마술사는 다음 세대를 지원하는 역할로써 못 다한 꿈을 이어 보고자 하는 것이리라.

마술하는 과학자! 의외의 조합이었지만, 사실 마술도 특수한 형태의 예체능이라 본다면 교수님은 본업인 물리학 연구에 짬을 내어 조금 남다른 부업, 혹은 취미를 가진 것이다. 교수님의 마술이 특별한 것은 그분이 이 취미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열정이었다. 40년 가까이 꾸준히 각종 대회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높이고 동료들과 교류한 것을 보아 교수님은 마술을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물리학 연구자로서 이룬 성과와 업적도 많은데 취미로 하는 마술까지 재야의 달인이 되셨으니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문득, 우리 주위에도 마술하는 교수님과 같은 사례가 없을까 궁금했다. 성공적인 직업 생활과 즐거운 취미 활동의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 꼭 독일에서만 가능하다는 법은 없으니까! 교수님의 사례에 우리 현실을 비춰 한번 따져 보았다.

교수님은 유년기부터 마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 및 취미 활동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요즘 정보는 찾기만 하면 넘친다.) 청소년기에는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방과 후와 방학 때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경험해 볼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입시와 학원에 투입되는 자원을 조금 줄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진로 결정을 할 때 교수님은 본인이 좋아하는 마술로 안정적인 생활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본업은 과학자, 부업은 마술사라는 투트랙 전략을 일찍부터 세웠을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취직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한 전략이다.) 교수님은 가정 살림과 취미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급여를 받는 좋은 직장이 필요했고 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직장은 많이 있을 것이다.) 교수님은 직장 동료와 상사가 마술이 교수로서의 직업 활동에 어떠한 부정적 영향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도록 본인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것이며, 직장과 사회도 그러한 취미 활동이 가능한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운동이 정착되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오래전 품었던 마술사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을 것이다. (곳곳에 숨은 인재는 많을 것이다.)

마술하는 과학자와 같은 진정한 `워라밸` 사례, 대한민국에서 삶의 질이 높은 곳으로 꼽히는 과학과 문화의 중심지 대덕특구라면 곧 많이 나오지 않을까?

이동훈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학표준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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