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에 대한 일화이다. "새 옷을 빌려 입고 잔칫집에 온 어느 가난한 부인이 하녀가 국물을 쏟는 바람에 치마가 다 젖어 당황해하자 신사임당이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해 보겠습니다` 하더니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룩진 국물 자국이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라고 했다"(위키백과).

신사임당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4번이며 별칭은 예술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시기와 불굴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시기는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높은 수준의 성공을 이루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 예민하며 시기심과 고통을 자주 느끼지만 내면화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평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혼자서 견딘다.

그는 1504년(연산군 10) 강원도 강릉 죽헌리(오죽헌)에서 신명화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1516년(중종 11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된 것을 계기로 대과와 관직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에서장인 내외와 함께 지냈다.

사임당은 어린 시절 외조부로부터 학문과 시·서·화를 배우면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다섯 딸들 중에서도 특히 영민하여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진전을 보였다. 외조부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7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쳤는데, 특히 산수화에 재주를 보여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한다.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한 후 초기에는 주로 친정에서 지냈고, 38세에 한성의 수진방(종로구) 시댁으로 완전히 떠나오기 전까지 한성과 시댁 선조들의 터전인 파주를 오갔다. 슬하에는 4남 3녀를 두었는데 셋째인 아들이 율곡 이이다.

그는 시·서·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여럿 남겼고 특히 그림에는 송시열을 비롯한 후세의 학자들이 발문을 붙여 격찬할 정도였다.

그가 성리학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여성으로서 예술가의 재능을 발휘한 데에는 외조부·부친·남편 등의 조력이 컸다. 게다가 4유형인 그의 심리적 기저에는 자신이 의도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추동되었다.

그는 남편이 과거 시험 준비에 정진하지 못하는 것과 축첩(畜妾) 등 일상에 대하여는 압박과 힐난을 가하며 냉냉한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사회의 규범적인 부덕(婦德)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태도인데, 4유형이 옳다고 믿는 가치기준에 집착하는 모습의 전형이기도 하다.

그가 사후에도 양반사회에서 자녀들의 훈육에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앙된 것은 아들이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탓도 작용했다. 송시열은 그의 작품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며 "율곡을 낳으실만 하다"(위키백과)고 했다. 그러나 아들에 의해 오버랩된 이면에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탁월한 예술가의 모습이 뚜렷이 자리하고 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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