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1년 역사적인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은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해 고대 강국인 백제의 위상을 한껏 끌어 올렸다. 50년이 가까워지면서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확인하는 일이 거듭되고 있다. 2021년 개최 예정인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을 앞두고 `무령왕릉 지석의 새로운 해석`을 주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이 대표적이다. 이나다 나쓰코 일본 도쿄대 박사는 통설인 무령왕비 시신 빈전 안치설에 대해 반론을 펼치면서 새 해석을 제기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4월 쌍릉 대왕릉에서 발굴한 인골이 백제 무왕일 것이라고 추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덤 구조와 규모, 유물의 품격, 백제 시대상 등을 감안할 때 그 개연성이 대단히 크다는 설명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무령왕비를 두 차례 매장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나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의 실체가 보다 확실히 드러나는 건 백제의 후예들에게 패배자의 역사로 낙인찍힌 백제사 복원을 명령하는 듯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고대해양국가였던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다시피 했다. 패배만이 부각되면서 백제인의 웅혼한 기상과 오늘 날에도 흉내 내지 못할 글로벌 마인드는 폄훼됐다. 70년대 신라 중심의 경주권 개발이 집중된 반면 공주 부여는 홀대 받으면서 복권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미증유의 금동대향로 같은 문화재 출토도 정당한 평가를 받았는 지 반성할 일이다.

벡제의 후예인 충청이 중심이 돼 복원에 나서야 마땅하다. 충남도를 비롯 충청권 자치단체들이 중심이 돼야 하겠지만 백제 영역이 오늘의 서울에서 호남을 아울렀다는 점에서 거시적 접근이 아쉽다. 일본 및 중국과 손 잡고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도 절실하다. 백제의 문화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등에 업고 왜와 가야를 포함한 고대 동아시아 공유 문화권을 형성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계승하는 게 후손의 몫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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