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의 한 트렌드는 역사 속의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짧은 드라마로 엮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가의 해설까지 곁들여 신빙성을 더해주니 교과서 속의 한 줄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부여에서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이런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백제의 역사와 찬란한 유물들 때문에 다른 시대의 소소한 이야기까지는 발굴이 요원하다.

그 중에 하나가 카스텔라 맛에 반했던 부여 출신 조선의 선비 일암 이기지(1690-1722)의 이야기이다. 조선의 학자 이이명(1658-1722)은 1720년 연행사로 베이징에 파견을 가게 되면서 아들인 일암 이기지와 동행한다.

새로운 문물과 학문적인 호기심이 강했던 일암은 베이징을 돌아다니며 서양 문물과 중국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 때 그를 가장 매혹했던 것은 베이징의 카톨릭 성당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대접을 받았던 카스텔라였다.

"서양 떡 30 개를 먹으라고 내왔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薄桂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해서 직사각형으로 크게 썰어 기름에 지진 조선의 과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입 안에 넣자마자 녹았는데 그 맛이 부드럽고 감미로왔다.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재료는 밀가루, 달걀, 사탕가루 등이라고 한다."

맛에 대한 기억만큼 뇌리에 오래 남는 것도 없다. 일암은 베이징에서 돌아오자마자 달콤하고 부드러운 서양 떡, 가수저라(카스텔라) 만들기를 시도한다.

"가수저라는 정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 냄비에 담아 숯불로 색이 노랗게 되도록 익히되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가장 상품이다".

일암은 베이징에서 먹었던 카스텔라의 부드럽고 달달한 맛을 잊지 못해 레시피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올랐을 것이다. 그의 머릿 속에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촉했던 천문, 지리, 음식에 대한 선진 문명을 조선에 어떻게 도입할지에 대한 고심과 함께 카스텔라 만들기에 대한 시뮬레이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빵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일화가 바로 일암 이기지의 베이징에서 먹어본 카스텔라이다. 바로 그 일암 선생이 내가 사는 고장 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부친은 좌의정 이이명이며 모친은 구운몽의 작가인 서포 김만중의 딸이다.

일암의 카스텔라 레시피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당시의 지식으로는 달걀 단백질을 팽창시켜 부드러운 식감을 내고 설탕으로 달달함을 더해 대류 열로 익힌 밀가루의 가벼운 풍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카스텔라를 우리의 설기떡과 비슷한 `서양떡` 이라고 지칭하며 어리숙하게 적어온 레시피 그대로 카스텔라 만들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암의 카스텔라 만들기에 대한 도전은 1년 남짓 밖에 이어지지 못한다.

일암이 신임사화(1722년)에 연루되어 32세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지만 않았더라면,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을 거쳐 조선 최초로 카스텔라를 도입하고 만드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카스텔라 만들기에 성공을 했더라면,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으로 대접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 고장 부여는 백제 역사의 고장이라는 인식보다 맛있고 전통이 있는 카스텔라 혹은 가수저라의 고장으로 더 알려져 있을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카스텔라 만드는 비법 레시피 하나 정도는 전승되어 오다가 카스텔라 축제를 여는 고장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툭하면 언론을 비집고 나오는 의자왕의 삼천궁녀 논란으로 부여 군민들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기는 일보다 카스텔라의 본고장으로 더 알려졌을 것이었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한 고장의 운명까지 좌우하는 일은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일암은 1725년 영조가 즉위 시에 복권이 되어 사헌부지평에 추증됐다. 생전에 베이징에 다녀와서 기록해놓았던 글을 모아서 아들인 이 봉상이 일암연기 라는 저서로 남겨놓았다. 일암연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카스텔라 빵의 원조가 될 뻔한 조선의 선비, 일암은 충남 부여군 옥곡리 선영에서 선진 문물로도 바꾸지 못한 세상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오창경 해동백제 영농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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