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무렵 박규수는 개화파 지식인들과 함께 자신이 만든 지구의를 보며 "중국이 어디에 있는가.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이 되는데 오늘날 어디에 중국이 있는가"(인물한국사)라고 했다 한다. 당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중국중심주의`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규수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근심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분노는 자신이 불완전하므로 완벽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앞일을 예측하고 걱정하며 세부사항까지 통제하고자 한다.

그는 1807년(순조 7) 서울 재동에서 박종채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조부는 연암 박지원이다. 성장기에는 가세가 빈한하여 주로 친인척들로부터 수학했으나, 15세 무렵에는 나이를 넘어 성리학의 대가들과 교유할 정도로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1827년(순조 27) 경에는 약관의 나이로, 대리청정중이던 효명세자와 친분을 나누며 학문과 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토론했다. 그러나 개혁군주의 자질을 보이던 세자가 1830년 급서하자, 개혁 가능성에 대한 기대만큼 상실감도 컸다. 게다가 부모의 연이은 죽음으로 18년 간 칩거하면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이 시기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

1848년(헌종 14)에는 42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합격했다. 그는 이때부터 철종·고종의 치세 동안 사간원정언·도승지·사헌부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냈다.

1862년(철종 13) 진주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민란에 대하여는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수탈이 주된 원인이라 보고 안핵사로서 수습대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1866년(고종 3)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허락없이 평양 인근 대동강에 나타나자 침몰공격을 지휘해 쇄국을 정책기조로 했던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그해 천주교도들이 대규모로 혹독한 탄압을 받은 병인박해 때에는 평안도 관찰사임에도 관대한 처벌로 일관했다.

그는 두 차례나 조부처럼 사신으로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당시 국제정세를 읽고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자주적인 개방 주장이 수용되지 않고, 수구파인 정권실세들과 충돌하게 되자 1874년 우의정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용후생의 북학과 연계된 개화사상은 그의 사랑방에 드나들던 김옥균·박영효·김홍집·유길준 등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그의 문하인 김윤식은 "공(박규수)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윤기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며 탄식했다"(위키백과)고 전한다.

1유형인 박규수는 특유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열강들의 각축 속으로 내몰릴 조선의 장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어둡고 모순이 가득했던 권력지배층에게 그의 통찰을 수용할 만한 공간은 없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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