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은 지금까지 102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07세에 타계한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그 107세에도 영화를 만들었다. 레오 까락스는 겨우 24살에 영화사에 남을 걸작을 선보였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 인생은 시시하게 느껴진다. 지금부터 100세까지 살면서 매년 한 편씩 영화를 만들어도 임권택 감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걸 생각하고 있자니 힘이 빠지고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한동안 영화를 하지 않았다. 다른 분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쪽에서는 영화를 포기한다고 하면 꾸지람은커녕 칭찬을 듣는다. 가족들은 만세를 부른다.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다 보니 끝까지 영화를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어쨌거나 영화를 잊고 살았더니 시간은 부드럽게 잘도 흘렀다. 누군가를 질투할 필요도 없어졌고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가 자는 밤에 일어나 시나리오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생활인으로 살면 그만이었다. (물론 생활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다시 영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를 만들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일은 힘들고 재미없다. 어렵게 만들어봐야 사람들은 봐주지도 않는다. 생활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고.

아이였을 때, 길을 걷다가 뭉게구름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잊고 있던 그 느낌이 되살아난 건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이다.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랄까, 다시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 이거면 됐다. 영화를 만들 이유로 충분하다. 독립영화든 뭐든 간에 말이다. 영화를 만드는 게 이토록 즐겁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내 즐거움이 전달되지 않을까. 난 그렇게 믿고 있다. 마치 내가 올리베이라의 열정에 놀란 것처럼, 그 영화에 감동한 것처럼.

오세섭 독립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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