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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논단] 흉내의 함정

2018-07-12기사 편집 2018-07-12 08:4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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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휘호대회 심사를 해보면 약간 아쉬움이 남는 작품을 이따금 만나게 된다. 수련한 나이에 비해 너무 조숙하다. 이것이 진정한 숙(熟)일까? 아니다. 조숙과 노숙은 다르다. 노숙은 손과정이 말하는 "마음은 정(精)함을 미워하지 말고 손은 익숙함을 잊지 말아야 함"을 오래 체회(體會)한 후 나타나는 현상이고, 조숙은 노숙을 흉내 낸 것이다. 흉내는 창작을 하기 위한 기본과정이라고 한다. 사실 인생을 비롯해서 정치·경제·학술·문화예술·공산품 등 어느 것 하나 앞사람이 이뤄 놓은 것을 참고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베끼기만 할 것 인가? 원작 보다 나은 속편이나 리메이크작은 나오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가 흉내만 냈다면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을까.

흉내는 당장은 쉽고 좋아 보이겠지만 함정이다. 홀로서기를 앞당겨야 한다. 서예공부의 한 과정인 임서(臨書)만 하더라도 흉내와 다르다. 임서에는 의임(意臨)이 있잖은가? 의임은 창작이다. 작가는 흉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창작의 문으로 나와 참된 자유를 찾아야 한다. 창작의 자유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독특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으로, 옛 것을 근거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공자는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안다면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고, 또 "내 나이 70이 되니 마음가는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다. 조맹부는 만년에 창작의 자유를 얻었다고 스스로 자부하였다. 그가 선조들의 흉내만으로 이를 얻었겠는가? 아니다. 피눈물 나는 인고의 결과이다. 오랫동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새기고, 손으로 체험하기를 수천, 수만 번 거듭한 후 깨우친 경지이다. 그는 만고불역의 용필법으로 정선된 서첩과 서법을 고루 섭렵한 후 그의 정신성을 더하여 그만의 독특한 창의성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자주 동동주 담그는 법에 비유한다. 술을 빚으려면 우선 좋은 쌀과 누룩, 물, 단지 등이 필요하다. 정선된 재료와 도구에 더 요구되는 것이 정성스런 마음이다. 그래야 용수에 맑고 담백한 술이 고인다. 아무리 좋은 재료와 도구가 있어도 마음에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좋은 술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인서구로(人書俱老)와도 연관이 있다. 사람과 글씨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야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 경지의 도달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냥 모방해서는 안 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어떤 정신으로 정진했는지 등을 살피고, 빨리 얻으려는 욕심을 억제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에 비례해 창신성이 발휘된다는 말이다. 한 예로 만년에 꾸밈없이 이루어진 동서(童書)의 경지를 젊은 나이에 그대로 흉내 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패기와 기상이 있어야 한다. 터질 듯 한 패기와 기상이 제재(制裁)의 수련을 거치면서 자연스런 완숙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점을 염려하여 정자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마음이여! 본래 허하니 사물에 응함에 자취가 없다. 마음을 잡음에 요점이 있으니, 보이는 것이 그 법칙이 된다. 사물이 눈앞을 가리어 사귀면 마음이 옮겨가니, 밖에서 제재하여 안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라. 이것을 오래하면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은 본래 허령하여 욕심이 없는데 눈으로 보이는 것이 마음에 영향을 주므로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함양(涵養)의 과정을 거쳐 얻어진 창작이야 말로 그 작가의 '마음의 그림'이 되는 것이다. 이 심화(心畵)가 감상자의 마음에 오래오래 새겨질 때 보배로 남는다. 눈앞의 달콤한 유혹이 허망인줄 알면 소요자재인(逍遙自在人)이 된다. 모두 흉내의 함정에서 과감히 탈출해 창작의 자유를 만끽해 보자. 송종관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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