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0월 12일 갑신정변 5일 전, 고종을 독대한 김옥균이 개혁정부의 당위성을 역설하자 고종은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위키백과)며 신임했다 한다.

김옥균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7번이며 별칭은 낙천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닉과 피암시성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현실의 삶보다 더 좋은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몽상가이다. 낙천적·열정적이며 순진한 경향이 있다. 세상을 실제보다 좋게 보려고 한다. 삶의 지루함을 잊고자 특정 대상에 열광한다.

그는 1851년(철종 2) 충청도 회덕(대전시) 외가에서 안동 김문인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나 공주 친가에서 자랐고, 6세 때 권세가이던 당숙 김병기에게 입양되었다. 11세 때에는 양부가 강릉부사에 임명되자 16세까지 율곡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공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뿐만 아니라 시·서·화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 한다.

1870년 무렵에는 홍문관 제학 박규수의 문하가 되어 신문물과 서적들을 접하고, 신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1872년(고종 10)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양부와 박규수의 후원으로 성균관 전적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올랐다.

1876년 그를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불평등한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나라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881년에는 주도적으로 조사시찰단을 조직하여 박정양·홍영식·윤치호·유길준 등과 함께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했다.

그는 이듬해 발발한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 일본의 배상 요구와 또 다시 불평등한 제물포조약을 지켜보았다. 이후 승정원우부승지·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 등의 신분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전횡과 무역 불균형, 물가 폭등, 거듭된 대외 배상으로 고갈된 재정 등 조선은 이미 정상국가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가 공을 들이던 외자 도입이 실패로 끝나고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에서도 수구파의 공격으로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자 그는 혁명을 구상했다.

마침 청나라가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 문제로 프랑스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에 주둔중이던 병력을 이동시키고, 청나라와 수구파를 견제하고자 했던 일본의 협조도 약속받았다. 게다가 같은 7유형인 고종의 동의까지 얻었으므로 거칠게 없어 보였다.

그를 비롯한 개화파들은 우정국 낙성식 날 거사를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을 폐지하는 등 14개 조항의 강령을 통해 주권국가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그는 7유형답게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고 치밀하지 못했다.

지지기반이 취약한 개혁내각은 민씨 척신 중심의 수구파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반격하자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그가 의도하던 조선의 개혁도 무망한 일이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울분의 세월을 보내다가 1894년 청나라의 이홍장과 담판을 짓겠다며 상해를 방문중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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