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막상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본 사람은 흔하지 않다. 1969년부터 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써내려갔으니 양도 어마어마하고 곡절도 산을 이룬다. 전체 5부 20권 약 624만자, 200자 원고지 3만 1200장에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에 이르는 격동기를 배경으로 400여 명의 등장인물이 얽히고 설키며 빚어내는 이야기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한국문학이 이뤄낸 경이로운 성과고 자랑스러운 업적이다.

지난달에 대전시민아카데미에서 경남 통영으로 토지 문학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주말엔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으로 간다. 회원들이 7개월에 걸쳐 강의와 답사를 병행하면서 함께 격려하며 책을 읽어나가는 `토지 읽기 프로젝트`의 한 꼭지다. 아직 토지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감동을 느끼지 못한 이들이라면 황송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한국문학에서 토지가 일궈낸 성과가 아무리 높고 크다 한들 내가 직접 책의 면면을 더듬어가며 감동을 체감하지 못했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통영은 박경리 선생의 고향이자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일 뿐만 아니라 숱한 예술가들의 자취로 눈부신 고장이다. 백석 시인이 이곳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왔다가 친구에게 빼앗기는 아픔을 겪은 사연이 몇 편의 시에 남아있는 줄 알았지만 법정 스님과의 인연은 뜻밖이다. 선생은 풍진 세상을 돌고 돌아 통영 미륵도의 품에 안기셨는데 산 너머의 미래사는 법정이 출가한 절이다. 법정은 서울의 길상사에서 입적하는데 백석의 연인인 자야가 세운 절이며 `길상(吉祥)`은 토지의 주인공 그 길상의 이름이다. 얽히고설킨 인연이다.

`토지`에 나오는 수많은 군상들이 꿈꾸는 건 미래(彌來), 미륵이 오신다는 구원의 세상이다. 미륵은 언제야 오실 것인가. 영영 오시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박경리 선생이 유고시에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한 마음에 잇닿아있다. 그걸 깨닫는다면 길상이며 법정이며 사랑을 잃은 백석 시인이며 박경리 선생이며 우리들 저마다가 이미 미륵인 것인지도. 김석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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