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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어그램 심리산책]월남 이상재의 유연함

2018-07-02기사 편집 2018-07-02 16: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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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경술국치 직후 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이완용·박제순 등을 만난 이상재가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가셔야 겠습니다"라고 함에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다시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들이 일본으로 이사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닙니까?"(위키백과) 라고 했다 한다. 촌철살인의 조롱이었다.

이상재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경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분노는 자신을 올바름과 완벽함에 집착하게 한다. 옳다는 믿음은 우월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며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높은 의식수준에서 해학과 정서적 유연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1850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말 학자 이색의 후손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그는 18세 무렵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 횡행하던 시험부조리 등 영향으로 낙방하고 고향에 머무르다가, 개화파 지식인이자 승정원 승지직에 있던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일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

1881년에는 박정양이 일본 문물을 시찰하기 위한 신사유람단에 선발되자 그를 수행하면서 김옥균·홍영식·어윤중·유길준·윤치호 등을 알게 돼 이들과 깊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1884년 우정국총판 홍영식의 권고로 우정국 주사·사사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을 계기로 사퇴하고 낙향했다. 1887년 박정양이 미국공사관 전권대사로 임명되자 외교관 신분으로 그를 수행하여 1년여 동안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1892년 전환국위원을 거쳐 승정원우부승지·학부참사관·법부참사관·학부아문참의겸 학무국장을 지냈다. 학부아문참의일 때는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붕괴되자 내각총서에 올라 공직기강 확립에 애썼다. 서재필·이승만·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1898년에는 관민공동회를 열고 부의장 자격으로 국정개혁에 관한 6개 항의 개혁원칙을 결의하여 이를 고종에게 상소했다.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이승만이 전달한 성서를 읽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승만을 후원하였으며 출옥한 이후 의정부참찬직에 잠시 머무른 것 외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YMCA를 중심으로 선교활동과 청년계몽·교육운동에 전념했다.

1유형인 그는 풍자와 해학에도 능해 어느 겨울날 강연에서는 총독부의 헌병과 순사들이 그를 감시하자 "'개나리꽃이 활짝 폈다'고 일갈했다. 당시 순사와 헌병의 제복이 황색인 점에 착안, 황색 '개'와 순사·헌병 '나리'를 조합하여 조롱한 것이었다…어느 저명 인사가 자발적으로 일본식 이름인 이토(伊東)로 개명함에 그 집 대문 앞에 용변을 보고는 그 인사가 이상재에게 항의하자 '너는 이 똥과 같은 놈'이라고 조롱했다"(위키백과) 한다.

그는 일생 동안 옳지 않은 일에 대하여는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였고, 악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유연함과 해학이 어우러진 날카로운 기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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