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6월 25일은 북한이 새벽 4시에 남한을 기습한 지 68년 되는 날이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졌으며 공식 집계된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 수만 250만 명에 달하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소련 자료들에 의하면 김일성은 남한해방을 위해 소련에 수차례 지원을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그런데 1949년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했고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고 소련이 핵무기개발에 성공한데다가 1950년 1월 미국이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자 소련, 중국과 북한은 남한을 공격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김일성은 소련이 지원해준 우수한 무기와 남한 내에 있는 공산당원 20만 명이 있는 터라 며칠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2살이었다. 엄마는 나와 5살 오빠와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1·4 후퇴 때 나는 업고 오빠는 걸리면서 걷다가 차를 얻어 타기도 하면서 내려오다가 대전에서 간신히 기차지붕에 올라타고 광주로 내려왔다. 피난민들이 가득 올라탄 기차지붕에서 오빠가 떨어지려 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잡아주어 이산가족을 면했다. 전쟁 후 국민학교 수업은 나무 밑이나 천막교실에서 진행되었고 아이들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폐허 속에서 전쟁놀이에 열중했다. 남편은 물놀이 중 불발수류탄을 만져 오른 팔을 잃었다고 한다. 1970년 미국에 유학 갔을 때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전쟁 얘기를 했다. 본인 또는 친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한국 전쟁고아들을 입양한 사람도 있었다.

북한 사람들과 직접 접촉한 경험은 1983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미터협약 회원국들이 모이는 국제도량형총회(CGPM)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었을 때 딱 한번이다. 북한은 대표 2명을 파견했고 좌석이 우리 좌석 바로 옆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애써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은 개회식 후 사라졌는데 이후 표준관련 어떤 국제회의에도 북한 과학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여타 과학적 활동은 미미했으리라 짐작한다. 북한은 회비 장기체납으로 인해 현재는 미터협약 회원국에서 퇴출됐다.

남북 화해기류가 조성되면서 국민들은 남북간 평화가 정착되고 민족공동번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희망에 차 있다. 그러나 6·25를 겪은 데다 나이가 이만큼 들고 보니 현재의 상황에 마냥 흥분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 또래의 많은 국민들은 나처럼 불안할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일당 장기집권 정권이라 국제 판세를 읽는데 노련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몰아가는데 매우 능하다. 중국과 북한은 군비를 계속 증강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역할을 재고하고 국방예산을 줄이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트럼프 정부의 한미군사훈련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종내에는 한반도에서 미군철수로 이어질 가능성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김정은은 남한 측의 선의를 선의로 갚을까? 약속을 지킨 적이 없는 북한을 어느 정도까지 신용할 수 있을까? 미국에 대한 유일한 협상카드인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할 진심이 있는 것일까? 비핵화 절차는 어떻게 하고 경비는 누가 지불하고 진행과정을 누가 감시 확인할 수 있을까? 김일성으로부터 대물림한 남한 적화통일 집념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핵무기를 보유하고 선군정치를 계속해오던 북한이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남한은 이에 맞설 군사력을 갖추고 있을까? 미군철수와 애치슨라인으로 6·25가 발발했는데 미군철수 가능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과 대책은 무엇일까? 미군 철수 후 북한이 적화통일 야욕을 드러내면 미국은 다시 군사개입을 할 것인가? 국방외교의 결과는 전 국민에게 영향을 주므로 절대로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 협상은 상대의 선의에만 기댈 수 없고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 그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할 견제력이 동시에 구비돼 있어야 한다. 정광화 前 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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