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한창이다. 축구의 왕중왕 이다.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 수비수를 제치고 차는 슛, 출렁이는 네트를 보고 있으면 무아지경 이다. 몰입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열광하는 관중의 함성, 성난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고, 천둥이 소용돌이가 돼 스타디움을 휘젓는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덕분에 이런 큰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안방에서는 물론 지하철에서, 스마트 폰으로, 원하는 장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러시아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게임을 원하는 형태로, 재생산해 볼 수 있는 것은 더 큰 행운이다. 정찬 요리부터 컵 라면의 형태까지, 월드컵 요리가 있다. 선택은 우리 몫. 실시간으로 전·후반 게임을 볼 수도 있고, 사정에 의해 실황 중계를 놓친 사람들은 기록된 게임을 필요한 장소에서 언제나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감상은 현장에서 보는 것이다. 정찬 월드컵은 국, 밥, 반찬 뿐 아니라 식후 식전 요리까지 나온다. 정찬 월드컵은 그래서 보는 것이기 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다. 그 곳에서 느끼는 함성, 한숨소리, 천둥 같은 고함, 땀 냄새 숨소리에 뒤섞여서 정신없이 관중석에서 날뛰다 보면 모두가 월드컵 그 자체가 된다.

중계방송을 볼 시간이 없거나 결과 혹은 중요한 장면만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TV에서 고맙게 제공하는 것이 `월드컵 하이라이트`이다. 대체로 골을 넣거나 실패하는 장면을 주로 해서 편집돼 있다. 바쁜 시간을 절약해 주고 또 중요한 것은 모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를 본 다음 날 동료들과 갖는 월드컵 대화는 좀처럼 실감나지 않고 밋밋하다. 책을 읽지 않고 요점 정리만 보고 시험 보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잘 정리됐는데, 하하 호호 대화에 끼기 어렵다.

만일 러시아에서 실제로 관람한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모든 대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하이라이트만 보고 모였다면? 상상이 쉽지 않지만,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될 것 같기도 하고, 또 축구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데이터를 인용하면서 이야기 하면 그런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우리는 하이라이트에 친숙하거나 길들여져 있다. 오랫동안 나름대로 미술품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해 보았지만, 많은 부분 미술품의 평가는 소위 비평가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화가와 비평가와의 관계는 그래서 언제나 긴장감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피카소의 야심작, 3개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자신 만의 그림을 그린 스페인 출신 젊은 촌 사람이 파리에서 "나도 그림 좀 그린다!" 라고 내 놓은 `아비뇽의 처녀들`은 비평가에게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처음 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고흐의 작품이 같은 길을 걸었고, 한국의 많은 화가들 또한 비슷한 단련의 시기를 거쳤다. 비평가 역시 하이라이트 혹은 자신의 경험과 안목의 눈으로 걸러내는 요약된 견해를 벗어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비평가의 평가만 있고 나의 평가가 없다.

그림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세계, 특히 정치 사회적 정보는 거의 전부가 기자에 의한 요약이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듣고 쓴 요약문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SNS로 가면 더 심각한 수준이다. 여기서 퍼지는 정보는 거의 현장감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 되는 의견이나 정보가 나오면 막강한 대다수가 거침없는 폭력을 쏟아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면 말고!

월드컵은 그래서 러시아에 가서 보아야 한다. 혹시 가지 못하면 누가 쓴 요약인지 어떻게 생산된 정보인지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이것을 게을리 하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는 광대일 뿐이다. 광대가 되지 말자, 내가 되자! 김양한 KAIST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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