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필로 어제시를 남겼다 한다.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송시열)가 이었으니 송자 또한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다…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위키백과).

송시열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과 소유·공모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가 사회적 규범과 다르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저항한다. 상황을 장악하고 그 중심에 서고자 한다. 부당한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관대하기도 하다.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 충북 옥천 외가에서 송갑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8세 무렵 회덕(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으로 옮겨 친족이며 첫 스승인 송이창의 집에서 그의 아들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수학했다. 이후에는 대쪽 같은 부친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0대 후반 무렵에는 연산(논산시)의 김장생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3년(인조 10)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을 하여 학문적 명성이 알려졌고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끌려가자 낙향해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세자시강원진선·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 등의 관직을 받아 벼슬길에 나갔다. 이때 그는 청나라에 대한 북벌론이 포함된 13개 조의 봉사(封事)를 올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주장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권신 김자점 일파의 견제로 사직을 청하고 다시 낙향했다. 그는 이때부터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효종의 부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아예 관직을 사양하면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1658년 효종의 간곡한 청으로 출사하여 이조판서직에 임명되었을 때도 북벌은 여전히 그의 신념이었다. 이것은 8유형인 그가 청나라로부터 당한 치욕을 되갚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구나 효종도 송시열과 같은 8유형이었기 때문에 북벌은 재위 기간 내내 정책기조로 유지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자세로 대했다. 특히 노비와 여성의 인권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양반 사대부에서부터 평민, 상민들과 여성들에게까지도 성리학을 가르쳤다…"(위키백과). 바로 자신이 돌보아야 할 대상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와 배치되는 대상과는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현종의 능 지문을 쓰라는 숙종의 명을 거부하고, 효종 서거 시 조대비의 복제 문제를 둘러싼 예송논쟁에서 조금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결국 1689년(숙종 15) 숙의 장씨의 아들(경종)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로 유배를 갔다가, 한양으로 압송 도중 6월 3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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