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그는 누구인가 (한국 정치, 그에게 길을 묻다)

향년 92세로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충청권 맹주`라는 수식어에 앞서 정치 승부사로 불렸고 그로 인해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은 획을 긋기도 했다. 물론 5·16쿠데타를 기획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한국 정치사는 물론 문화예술계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 등 다방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전 총리가 중앙정치무대에 첫발을 내딘 것은 1961년 5·16쿠데타였다.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당시 박정희 소장 등 육군사관학교 출신들과의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정치권 전면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의장, 국무총리 등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 하는 듯 했다. 하지만 1979년 10·26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히며 오랜 시간 칩거했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계기로 신민주공화당 총재로 정치 현장에 복귀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두번째 삶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1990년대는 김 전 총리와 함께 3김 시대를 연 김영삼(YS) 전 대통령,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경쟁하면서 한국 정치사의 키워드로 등장했다.

이후 3당 합당으로 YS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념적으로 섞일 수 없다고 판단됐던 DJ와 손을 잡아 DJP연합을 이뤄내 DJ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킹메이커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 전 총리가 이처럼 대통령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의 역할이 한 몫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5년 창당한 자미련은 충청권에서 승승장구하며 15대 총선에서는 전국적으로 50석을 확보하는 등 성공한 제3당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그동안 거대 양당이 정치적인 결정을 해왔다는 점에서 김 전 총리가 만든 자민련의 성공은 제3당의 필요성은 물론 캐스팅보트로서의 중요성도 일깨웠다. 이로 인해 김 전 총리는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전 총리는 문화계와도 폭 넓게 교류하면서 대중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중앙정보부장 시절이던 1961년 김 전 총리는 관현악단 40명과 합창단 35명이 모인 종합음악예술단체 `예그린 악단`을 창설했다. 예그린 악단은 이후 국립가무단과 시립가무단으로 이어져 대중문화예술에 크게 기여했다. 김 전 총리의 지원에 힘입어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또 당시 뮤지컬 주인공인 패티김과 작곡가 길옥윤의 결혼식 주례를 김 전 총리가 맡기도 하는 등 대중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 총리 재직시절인 1978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 6억 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기도 하는 등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서울=인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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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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