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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어그램 심리산책]율곡 이이의 올곧음

2018-06-18기사 편집 2018-06-18 10: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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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이이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그는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위키백과) 라고 했다 한다.

이이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경직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의 분노는 진실을 소유한 자신은 옳고, 남들은 그르다고 인식하도록 한다. 옳다는 믿음은 우월감의 원천이다. 지적이고 올바름에 집착하기 때문에 완벽해 보인다.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며 남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1536년(중종 30) 사헌부감찰을 지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13세 때 벌써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아홉 차례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한다. 1564년(명종 19) 28세 때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예조좌랑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년) 명나라 황태자 탄생일 축하사절인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 홍문관교리를 역임했고, 1573년 동부승지에 이어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그는 관직생활 중에도 이황·조식·성혼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7년에는 황해도 해주에 은거하며 아동교육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하는 등 학문과 후학 양성에 몰두하다가, 1580년 선조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나왔다. 그는 이 무렵부터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했는데, 특히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평생 동안 아홉 번이나 대사간 직에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일 때는 '시무육조'와 '봉사(封事)'를 상소해 국방력 강화와 적폐 청산을 위한 개혁 방안을 주장했다.

이 개혁 안에는 공납·군적 제도 개혁, 양반 군역 부과, 행정단위 통폐합, 공직자 수 조정, 관찰사 임기 보장, 서얼차별 금지, 신분 당파를 초월한 인재 발탁, 경제 전담기관 설치 등 파격적인 정책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사대부들의 집단 반발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서인계 관료들까지 그의 저의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가 동인과 서인 간의 당쟁을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평소 동인을 경계해온 그의 태도와 무관치 않았다.

선조가 이이에게 그의 절친인 우계 성혼에 대해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묻자,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입니다'"(위키백과) 라고 했다 한다. 1유형인 그에게는 상대가 임금일지라도 정확한 사실이 더 중요했다. 완벽치 못한 것은 개혁 대상일 뿐이었으며,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사안에 대하여는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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