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승리하는 사람`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승리를 한 사람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말이다. 피조물인 악은 창조주 선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선과 악의 싸움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선악과와 바벨탑의 이야기에서 잘 들어나고 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는 하느님과 반대로 인간은 자신을 채우고 높여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신다. 자신을 버리는 사람, 하느님께서 창조 때부터 종말 때까지 그러셨듯이 사랑으로 타자를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고 낮추는 사람이 바로 `승리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 앞에 악은 무능하며, 그가 비워낼수록 하느님께서는 그를 통해 많은 거룩한 일들을 해나가신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라는 구원완성에 대한 기도가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성취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한 `승리`는 내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어좌에 안아 계신 분이 말씀하신다. "다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될 새 세상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승리하는 사람`들이 차지할 새 세상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의 경험과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참조. 1코린 15장) 가톨릭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의 독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삶은 다가올 새 세상을 미리 드러내준다. 독신은 고난이 아니라 봉헌이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바로 독신이다. 이러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앞당겨 사는 삶이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봉헌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이미 여기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요한의 묵시록은 이렇게 심판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은(요묵 7,4)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말씀이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뜻하는 열둘에 열둘을 곱한 후 다시 `많음`을 뜻하는 천을 곱한 숫자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 말한다. "제가 인류 역사상 가장 패악한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혼자 다 지었다고 해도, 하느님을 만나면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분께 달려가 그 품에 안길 것입니다. 제가 지었다는 죄를 다 합해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용광로에 비하면, 그것은 작은 빗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강력하게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요묵 22,20~21) 오창호 천주교대전교구 신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