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이규보의 글 가운데 `경설`이란 짧은 한문수필이 있다. 번역가는 제목을 `흐린 거울을 보는 이유`라고 옮겼다. 이규보가 갖고 있는 거울은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소중히 여겼다. 그러자 어떤 이가 이렇게 물었다 "거울은 용모를 비추어 보는 것인데 당신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 용모를 비출 수도 맑음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울을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규보는 이런 대답을 했다, "거울이 맑으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싫어합니다. 차라리 먼지가 끼어 어두운 편이 낫습니다. 먼지가 끼면 겉은 흐리지만 맑음을 잃지는 않습니다. 만에 하나 잘생긴 사람을 만난 뒤에 갈고 닦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거울을 보는 이유는 맑음을 본받기 위해서였고 내가 거울을 보는 이유는 그 흐림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거울은 문학에서 상징적인 장치로 자주 쓰인다. 거울 속 자신과 거울 밖 자신을 비교하며 자아찾기의 도구로 활용된다. 거울과 얼굴은 서로를 비추며 성찰과 내면의 세계로 이끈다.

시인 윤동주는 그의 작품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자아를 돌아본다. 시인 이상은 `거울`이란 시에서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라며 내면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본다. 거울과 얼굴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물론 사람이 아름다운 용모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면을 얼마나 자주 비추는 지는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6월에 거울이 떠오르는 이유는 지방선거 현수막에 걸려있는 수많은 얼굴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제 얼굴에 침 뱉는 이가 있다. 선거판을 진흙탕으로 만드는 이가 있다. 쇠로 만든 낯가죽이란 뜻에 꼭 들어맞는 철면피도 있다. 맑음과 흐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정치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 생각나는 선거 전날이다. 그나마 현명한 투표가 좋은 정치인을 가려낼 수 있는 소중한 거울이 될 수 있기를. 결국 우리의 몫이다.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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