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정조 4) 6월 25일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인 8촌형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떠났다. 이때 마침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에서 피서 중인 청황제를 만나고 그해 10월 귀국하기까지,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적은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는 이 견문록으로 인하여 당시 사대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여러 분야에 대하여 파격적인 문체로 이용후생의 실학사상을 조선사회에 소개했다.

그는 청나라에 다녀와서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하며,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을 상소를 통하여 주장했다.

"서류(서자)들을 금고하는 것은, 옛날의 법에서 상고해 보건대 그런 법이 없으며, 예률(禮律)에도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초에 좀스러운 신하가 기회를 틈타 앙갚음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디 개국했을 때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위키백과).

박지원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8번이며 별칭은 도전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욕망과 공모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자신이 돌보아야 할 사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데 적극적이다. 부당한 희생자를 위하여 공격성을 보이거나 주장을 내세우며, 이 과정에서 반사회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통덕랑 박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계와 노론계 명문으로, 조부는 지돈녕부사를 지낸 박필균이었다. 그는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으나 청년기 이후에는 부친의 늦은 출사와 조부의 사망으로 넉넉치 못한 삶을 살았다 한다.

그는 1761년 성균관 사마시에는 답지에 나무를 그려넣고, 1770년(영조 46)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는 백지를 제출하는 등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북학파 학자들과 교유하였고, 주유천하하면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1778년(정조 2)에는 권신 홍국영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껴 황해도 금천 연암골로 은거하였고 그의 호의 유래가 되었다.

그는 학문과 문장 덕에 수차례 천거되었지만 고사하다가 1786년 50세 때 처음 출사해 금부도사, 사헌부감찰, 한성부판관 등의 관직을 지냈다.

1794년(정조 18) 충청도 면천(당진시 소재)군수시절에는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워, 창고에 10만 휘나 쌓아 두게 되었다. 이때 소문을 들은 호조판서가 그것을 팔 것을 제안하자 수입이 생길 것과 호조판서의 탐욕을 우려하여 곡식을 다른 고을에 나눠주었다…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어 석방시켰다"(위키백과).

그가 `양반전`을 비롯한 한문소설을 통하여 기발한 문체로 지배층의 특권 의식과 횡포를 신랄히 풍자한 것은, 부당한 희생자로 인식되는 민초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8유형의 심리적 기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양반계층의 허세와 성리학자들의 도덕적 위선을 비판함으로써 실사구시의 개혁적인 의식을 일깨우고자 하는 반사회적인 정서적 습관도 반영된 것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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