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시민들의 관심은 싱가포르의 미북정상회담에 쏠렸습니다. 그러나 그 회담에 관한 글은 쓰기도 어렵지만 시효가 나흘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전망하는 대신 과거를 돌아보는 글을 쓰렵니다.

1919년의 3·1독립운동은 모두 놀랄 만큼 거족적이었고 오래 이어졌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일본 사회도 놀랐지만, 시위에 참가한 조선 사람들 자신들도 놀랐습니다.

조선 사람들로선 이처럼 거센 독립운동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특히 국제 정치의 중심인 미국에 알려서 미국 여론의 관심과 지지를 받는 것이 긴요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이승만에게 상해, 파리, 호놀룰루 등지에서 전보들이 답지했습니다. 총독부의 잔인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4월에도 시위가 이어진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그 전보들을 들고 주요 신문들을 찾았지만, 기사를 실어주는 신문은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많은 자금을 들여서 미국의 언론을 우호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원래 러시아의 팽창을 막아내는 세력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여론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호의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의해 강화되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승만은 통신사 INS의 젊은 기자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의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이승만이 자신을 소개하고 전보 두 통을 꺼내놓자, 윌리엄스는 곧바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 기사가 여러 신문들에 실렸습니다. 그 뒤로 이승만은 그런 전보들이 들어오면 윌리엄스를 찾았고, 조선의 시위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덕분에 이미 `죽은 논점(dead issue)`이 되어버린 조선 독립이 작게나마 되살아났습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자신이 초대 대통령에 뽑히자,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외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1차대전에서 이긴 나라들에 속했고 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10년 전에 지도에서 사라진 조선이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 부활할 가망은 누구에게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부활하려면 미국 사람들이 조선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의 존재가 잊히면, 상황이 크게 바뀌어도 행운이 찾아올 길이 막힌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이승만은 기회가 나올 때마다 조선이 잊히지 않도록 애썼습니다. 요즈음 말로는 `소음 광고(noise marketing)`를 한 셈이죠.

이승만은 행운이 찾아올 길도 예측했습니다. 일본의 해외 팽창은 일본 사회의 특질에서 나왔으므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끝내는 미국과 충돌해서 패망하리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이 패망한 상황에서 그는 조선이 독립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런 기회를 잡으려면, 조선이 잊히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늘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그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돕는다`는 서양 속담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돕는 길은 행운이 작용할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바탕이라도 없으면, 하늘도 행운을 줄 수 없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빠진 싱가포르 회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행운이 작용할 작은 바탕이라도 마련했는가?` 그리고 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행운이 작용할 바탕을 마련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글은 이 난에 실리는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독자들께 그 동안 고마웠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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