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에 "왕들의 와인, 와인들의 왕"이라고 써서 자부심을 표현한 샤또 그뤼오 라로즈(Gruaud Larose)는 쌩줄리앙 마을의 내륙 맨 아래에 위치하여 자갈, 모래와 풍적 황토로 구성된 토양에서 다른 4개의 쌩줄리앙 2등급 와인과는 달리 마고 스타일의 우아하고 섬세한 와인을 생산합니다. 방문객을 위해 세운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의 높은 전망탑에서 사방으로 설치된 철제 바람막이를 전동으로 들어올리니, 82헥타에 걸쳐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포도원의 멋진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포도에 치명적인 우박을 피하기 위해 구름을 쫒는 용도의 대포를 설치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샤또 그뤼오 라로즈는 1725년 기사 그뤼오(Joseph Stanislas Gruaud)에 의해 조성되었고, 1778년 상속받은 라로즈(Joseph Sebastian de La Rose)가 자신의 성을 덧붙여 그뤼오 라로즈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1867년 2개로 분리되었던 포도원은 샤또 딸보의 소유주이기도 한 꼬르디에(Cordier) 가문에 의해 20세기 초반에 재통합되어 오래 보유되었다가, 1997년에 와인 거상인 자끄 메를로(Jacques Merlaut)가 소유한 따이앙 그룹(Taillan Group)이 인수했습니다. 따이양 그룹은 뽀이약의 오바쥬리베랄, 마고의 페리에르, 오메독의 까망삭 등의 등급 샤또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뤼오 라로즈는 현대적인 기술을 갖췄음에도 와인의 스타일은 가장 클래식한 와인, 탄닌과 농익은 과일이 주는 강렬함의 균형을 추구해왔습니다. 영할 때는 탄닌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나 병숙성을 거치면 놀라울 만큼 조화롭게 변모하여 복잡·미묘하면서 우아함을 주는 와인입니다. 메를로 포도밭의 비중이 30%나 되어 최근의 빈티지에서는 우아함과 품위를 표현하는 쪽에 더 비중이 맞춰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비발디의 사계와도 잘 어울린다고도 합니다.

6일 전 레오빌 라스까스에서 봤던 2015년 와인의 랙킹(오크통 숙성 중인 와인의 옮겨 담기) 장면을 그뤼오 라로즈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5분 정도가 소요되는 랙킹 도중 망치로 오크통을 계속 두드려서 나는 소리의 차이로 와인이 차는 정도를 감지하더군요. 랙캥을 멈추고 관을 빼니 오크통 구멍까지 와인이 꽉 차있음에, 보이지 않음에도 넘치기 직전에 멈출 수 있는 직원의 숙련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음 와인으로는 다른 샤또들과는 달리 조금 더 오래된 빈티지 와인 2개가 제공되었습니다. 샤또 그뤼오 라로즈 2002는 섬세하고 풍성한 질감, 조밀한 타닌의 느낌으로 꽉 짜여진 단단함, 기분 좋은 산도와 밸런스를 보여주었고, 잘 숙성된 세컨 와인 사르제(Sarget) 드 그뤼오 라로즈 2008도 맛 보았습니다. 전망탑 아래 설치된 시음실에는 스피툰(와인을 뱉어내는 통)을 비치하지 않고 벽면에 물이 흘러내리는 간이 분수를 사용하는 것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났던 남성 화장실이 연상되기는 했지만, 다른 샤또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이었습니다.

그뤼오 라로즈는 시음 적기에 다다른 시기에 방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지하 와인 창고에 50만여 병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2012년 샤또에 새롭게 고용된 마켓팅 담당자가 셀러에 쌓인 1989년산 와인이 만이천병이나 되는 것을 보고 오너 메를로씨에게 팔아서 자금 조달을 하자고 했을 때, 메를로씨의 답변은 "이 와인을 마시거나 팔기 위한 시간은 앞으로도 30년 이상 충분히 남아 있다"였다고 합니다. 다음 번 방문에는 한 잔에 10유로로 판매하는 1989년 와인도 맛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992년 싱가포르 근처에서 인양된 1872년에 침몰한 화물선에서 그뤼오 라로즈 와인박스가 발견되었고, 120년이나 지났음에도 맛을 잃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신성식 ETRI 미래전략연구소 산업전략연구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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