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6년(세조 2)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성삼문은 이 기회를 틈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한명회 등에 의해 틀어졌다. 이어 김질의 고변으로 그는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이때 세조가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며 다그쳤다.

이에 그는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육신전)"(인물한국사)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녹봉을 월별로 표시해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한다.

성삼문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의 분노는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행동이나 일하는 방식을 지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열의는 자신의 방식으로 타인을 완벽하게 만드는데 동기를 부여하는 분노로 이어진다.

그는 1418년(세종 즉위년) 충남 홍성에서 도총관을 지낸 성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때 문과에 급제한 뒤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개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고, 이후 수찬·직집현전을 역임했다. 스물다섯 살때에는 사가독서(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독서에 전념하던 휴가 제도)를 했다.

관직생활 초기 주로 집현전에서 활동한 그는 세종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참여했고,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의 앞날에 대한 고명을 받은 그는 공교롭게도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고 양위를 받을 때 예방승지 신분으로 국새를 전달해야 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세조는 당시 엘리트 관료인 집현전 학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그들에게 공신칭호를 부여하고 각별히 배려했다. 그러나 1유형인 그에게 세조는 섬겨야 할 왕이 아니었다. 개혁 대상일 뿐이었다. 열의에 기반한 분노는 강력했다.

그가 집현전 학사와 조정의 신하들을 규합하여 상왕의 복위에 나선 것은 단종과 선대 왕에 대한 충절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가 옳다고 믿는 통치체제의 정통성 훼손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리학에 기반한 윤리적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한 그는 6월 8일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으로 처형됐다. 그의 부친 성승과 다섯 아들, 세 아우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내를 포함한 아녀자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그의 시신은 전국 8도로 나누어 보내져 모욕을 당하다가 일부가 충남 논산에 매장됐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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