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에티켓, 포도주, 화장품, 미터. 이들의 공통점은? 프랑스다. 다른 건 고개가 끄덕여지나 마지막 단어는 좀 뜻밖이다. 미터? 키 잴 때 쓰는 그 미터? 그렇다. 길이 단위인 미터는 프랑스 발명품이다.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이 거래를 하면서부터 재고 따져야했고 분쟁을 피하자니 공인된 약속이 필요했다. 혁명 직전 프랑스는 마을마다 사용되는 도량형이 제각각이며, 심지어 같은 물건이라도 살 때와 팔 때가 달랐다. 정치가 탈레랑은 표준 도량형과 단위계 제정을 건의했다. 국가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일한다면 국왕에게 엎드린 백성이 아닌, 스스로 계산하고 판단할 줄 아는 시민으로 계몽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척도는 과연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할까? 혁명 정신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듯, 모두가 동등하게 소유하게 될 척도는 특정국가나 인물에 치우치지 않아야 했다. 이를테면 지구처럼.

이렇듯 지구 둘레를 기준삼자는 생각에는 프랑스 혁명정신인 평등의 개념이 녹아있었다. 북극과 적도 사이 거리의 천만분의 일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객관적인 척도가 될 터였다. 이를 길이의 척도 `미터`라고 부르자는 게 당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결정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그 거리가 얼마인지 하는, 숫자 하나였다. 세상의 크기를 재는 막대한 임무는 두 명의 천문학자에게 맡겨졌다.

1792년 6월, 들랑브르와 메솅은 수제 제작된 당시 최첨단 측정 장비와 조수들을 거느리고 됭케르트에서 바르셀로나까지의 자오선 호 거리를 재는 장기 출장을 떠난다. 관대한 사해동포주의자 들랑브르는 북쪽을, 꼼꼼한 완벽주의자 메솅은 남쪽을 향했다. 혁명과 전쟁으로 점철된 격변기에 국경을 넘나들며 거리를 측정하는 행위는 적국 동태를 파악하는 첩자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성격도 협업 방식도 달랐던 들랑브르와 메솅이었지만, 두 과학자 모두 억류, 사고, 연구비 중단, 심각한 부상 등,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오선 길이를 측정했다. 그들이 파리로 귀환한 것은 무려 7년이 지난 뒤. 그동안 아카데미는 변화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혁명기의 대혼란 속에서 당대 최고의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미터법을 강력히 추진한 콩도르세도 처형 직전 자결한 후였다.

어렵게 구한 측정값은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수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지구는 완벽하게 균일한 회전 타원체가 아닌, `호박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이었던 것이다. 측정은 기존 인식의 틀을 바꾸었다. 1799년에는 그들의 측정값을 참고한 미터가 공표되고 백금으로 최초의 미터 원기가 제작됐다. 미터는 단지 길이의 단위를 넘어선, 정치와 전쟁을 딛고 과학과 이성이 승리했다는 상징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정복은 순간이지만 이 업적은 영원하리라." 이 예언은 실현 중이다.

1875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17개국이 미터 협약을 했고,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를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다시 만들었다. 이 날을 기념해 5월 20일을 `세계 측정의 날`이라 부른다. 그로부터 꼭 백년 뒤인 1975년, 우리나라 국가측정표준 대표기관인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이 설립됐다.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현재 KRISS는 선발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측정기술력으로 많은 개발도상국에도 측정표준을 보급하고 있다.

2018년은 측정표준 역사에서 특별한 해다. 올해 11월,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일곱 가지 국제단위계 중 무려 네 가지나 다시 정의된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단위가 재정의되기는 역사상 처음이다. 질량, 온도, 전류, 물질량은 인공물이나 특정물질 기반이 아닌, 변하지 않는 물리상수를 기반으로 좀 더 정확하고 안정된 기준으로 바뀐다. 단, 일상생활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서 말이다. 변한 게 없어 보이지만 근본 철학부터 바뀐 큰 변화다.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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