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하면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는 시 잘 짓고 여러 남자들과 갖가지의 사랑행각을 벌인 송도의 기녀일 뿐이다. 그러나 재주와 미모만으로 박연폭포,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녀의 사후 허균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문장가 백호 임제는 1583년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해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시를 읊으며 넋을 달랬다. 사대부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조정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고 임제는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고 말았다.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기백을 가진 임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심각한 저항의식을 가졌던 사상가로서 임종 시 자식들에게 곡을 하지 말라며 `물곡사`라는 시를 남겼다. 황진이는 죽을 때에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 북을 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인도하라고 일렀으며 무덤을 길가에 잡으라고 했다. 임제는 황진이에게 짙은 동지의식을 느꼈을 것이며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면 둘은 참으로 또 많은 일화를 남겼으리라.

황진이는 자신을 짝사랑하여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시신위에 속옷을 벗어 덮어줌으로써 조선중기 여인들에게 씌워진 숨 막히는 인습과 정조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왕족 벽계수, 명창 이사종을 비롯한 남성들에 대한 열정과 그들과의 교류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으려고도 하였다.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선사의 옹졸한 불교수행방법이 구도의 길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에게서 도를 찾으려 하였으나 유교도덕의 굴레에 잡혀있는 그에게서도 역시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이 일화들은 구도자로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과정이었으며 지족선사도 서경덕도 각자의 수행 및 학문의 길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각자의 공부에 큰 진전을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속되는 정신적 허기에 황진이는 이생이라는 청년과 함께 금강산행을 감행한다. 이생은 일찌감치 포기하였지만 황진이는 혼자서 구걸도 하고 몸도 팔면서 금강산의 명소를 속속들이 다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내친걸음에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구경하고 전라도 나주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마침 나주목사가 큰 잔치를 벌이고 있어 주변의 모든 명창들이 다 모여 있었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얼굴에 때 자국이 잔뜩 묻은 황진이는 잔치자리에 슬며시 끼어들어 노래 한 곡조를 간드러지게 불러 나주목사를 비롯하여 좌중을 놀라게 하였다. 그녀가 황진이임을 알게 된 목사가 그녀를 잔치의 귀빈으로 모셨는데 그녀는 옷을 헤집고 이를 잡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한다.

그녀의 일탈을 말하는 여러 가지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사회적 지위, 부, 사랑, 그리고 육신의 허망함을 일찌감치 터득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여자이기에 더욱 더 처절하게 길을 찾아 헤맨 용감한 구도자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그녀의 연시마저도 상대방에 대한 정열은 보이지만 집착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자연과 인생을 동일시하는 정신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자신은 변함없는 청산이고 자기를 거쳐 가는 연인들은 흘러가는 녹수로 비유하였다.

황진이가 기녀가 아니었으면 화려한 사랑 행각이 아니었으면 역설적으로 그녀의 존재는 잊혔을 것이다. 황진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고 자료 또한 모두 유실되었다. 구걸과 몸 팔기로 전국을 주유하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명산들을 돌아보아야만 하는 정신적 절박함과 도중에 겪었던 위험과 감동, 맺은 인연과 사색을 쓴 시들도 많을 테지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특히 화려한 사랑놀이로 남자들을 희롱하던 기녀로서의 허울이 너무나 극명하여 그나마 남아 있는 시에서도 황진이의 참모습은 찾으려하지 않는다. 언젠가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위대한 작가가 황진이의 시대에 대한 저항의식과 문학성과 선구적인 도학자로서의 철학을 정당하게 평가해 진정한 자유를 갈구했던 황진이 내면의 방황과 고뇌를 밝혀주기를 바란다. 정광화 前 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