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이들의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다

네델란드의 `요한 호이징하`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사람`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의 책 `호모 루덴스`는 `놀이는 문화에 앞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놀이는 문화 이전의 행위였고, 더하여 문화는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놀이는 본능 이후에 가장 원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행동이 관찰되지 않는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놀이 행동은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마당에서 노는 강아지들을 보자. 강아지들은 서로 물고 할퀴는 시늉을 하면서 논다. 온몸에 침을 바르고, 물고 짖어대고, 도망가고 쫓고, 서로 엉켜 뒹굴기도 하며, 이리저리 깡충거리며 즐거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강아지들의 놀이가 무턱대고 서로 힘자랑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강아지들의 놀이에도 몇 가지 규칙이 발견되는데, 이를테면 피가 나게 물어서는 안 되며, 귀를 물어서도 안 되는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격렬하게 노는 강아지들을 보면서도 어미는 새끼들의 놀이에 간섭하지 않는다. 조용히 바라보거나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강아지들의 놀이는 어디까지나 강아지들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놀이 형편은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의 놀이에 어른들의 간섭과 의도가 깊이 배어 있다.

최근 놀이를 활용하는 분야가 매우 다양하다. 심리, 의학, 사회, 정치, 경제 등 많은 영역에서 놀이는 중요한 의제 중의 하나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놀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놀이를 활용하는 영역이 확대될수록 아이들의 순수한 놀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아이들끼리 질펀하게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줄어들고, 설령 있다 해도 아이들이 무작정 놀게 놓아두지 않는다. 영어 단어를 외우든지, 근육을 단련하든지, 놀이는 하되 실제로는 다른 무언가 목적을 달성하게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많은 경우 돈벌이의 수단으로 아이들의 놀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사행성 놀이는 넘치고 넘친다.

아이들의 놀이에 다른 목적을 부가하면,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놀이교육은 교육의 한 방법이고, 놀이치료는 치료의 한 수단인 것이다. 놀이교육이나 놀이치료에 놀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금방 지루해지고, 놀면서도 눈치가 보이고, 불안하면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순수한 놀이와 전혀 다른 반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놀이는 재미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재미가 전부도 아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와 별 관계없을 법한 곳에서도 제법 많은 놀이가 발견된다. 고된 노동의 현장에서도, 슬픔 가득한 장례 행렬에서도, 엄숙하기 그지없는 제천행사에서도 놀이는 발견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프랭클의 보고에 의하면, 절망으로 가득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은 놀이를 했다고 적었다. 놀이는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놀다보면 재미있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고, 두려움을 잊고, 힘을 얻으며, 신께 다가가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놀이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한다.

대전시교육청에서 시행하는 놀이통합교육의 이념도 그렇다. 우선 아이들끼리 질탕하게 어울려 놀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일차적이며 궁극의 목표인 것이다. 놀이를 통해 인성이나 창의성을 기르고, 협동심과 체력을 기르자는 것은 실컷 놀고 난 다음의 일이다. 아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놀고 나면, 재미 뒤에서 그런 가치들은 자연스럽게 실현된다는 것이 많은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마을에서 다 해소 하지 못하는 그 놀이의 욕구를 학교를 통해 풀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대전시교육청의 놀이통합교육은, 아이들의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윤국진 <대전교육과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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