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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이야기] 문화재는 원형대로 보존해야?

2018-05-23기사 편집 2018-05-23 17: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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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원형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에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듯하다. '그래, 그럼 원형대로 보존하자' 라고 마음 먹고 일을 시작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나타난다. 그런데 원형이 뭐지? 하는 의문이다.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이다. 원형(原形), 말 그대로 '원래의 모습'이니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일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처음 만들어진 이후 변화된 것은 전부 잘못된 것인가? 잘못된 것이라면 '원형보존'을 위해 덧붙여진 것은 제거하고 없어진 것은 새로 만들어 '처음 만들어진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숭례문을 사례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태조 7년(1398) 태조실록에 따르면, "도성 남문이 완성되어 임금이 가서 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 29년(1447) 세종실록에는 "숭례문을 새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즉 태조 7년에 숭례문을 세운 후 세종 29년에 숭례문을 새로 고쳐 세웠다. 세종은 태조 당시 처음 숭례문을 세울 때 땅을 지나치게 낮고 평평하게 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땅을 북돋워 산맥을 연결하고 그 위에 다시 숭례문을 세우고 싶어했다. 이후에도 숭례문은 성종 대에 큰 수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숭례문 상량문에 보이고 이때 지붕 모양을 비롯해 상당한 부분이 변했다. 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고종 대까지 계속 변화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양쪽 성벽이 헐리고 전차가 지나가는 큰 변화가 있었다.

또 하나, 경복궁 사례를 살펴보자. 경복궁은 조선 개국 초기인 1395년에 완공되었다. 390여 칸 정도 되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이후에도 여러 전각이 지어졌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방치되었다가 고종 대인 1865년 중건을 시작하여 1868년 완공되어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이때는 칠 천 칸 이상 되는 굉장한 규모였다. 경복궁 또한 일제강점기 중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조선총독부청사가 들어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원형을 만들어진 첫 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원형대로 보존하고자 하면 태조 이후 숭례문과 경복궁의 변화는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세종을 비롯한 옛 사람들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그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일제강점기의 변화는 '훼손'이라는 용어로 '정상적인 변화'와 구분한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복구 때 문화재청은 숭례문의 복구 기준시점을 조선시대 말로 보았다. 또한 1991년부터 201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경복궁 복원에서는 1868년 중건 이후 두 차례의 화재를 겪고 이를 회복한 1888년을 기준시점으로 보았다. 이는 조선의 산물인 숭례문과 경복궁이 조선시대 내내 겪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 곧 진화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비정상적인 변화'인 훼손은 문화재의 진화로 보지 않았다.

경복궁의 경우 이에 대한 상당한 반론도 있었고 일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경복궁 내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청사 철거를 둘러싼 논쟁이다. 불행한 역사도 역사이니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인 조선총독부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반하는 목소리는 경복궁의 원형을 복원하려면 반드시 그 정면을 가리고 있는 저 건물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실체는 인정하더라도 그 위치가 너무 노골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형의 개념에 누적된 시대의 변화와 역사의식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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