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1시간 정도 차로 가면 베르사이유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의 많은 볼거리 중 하나는 단연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나폴레옹 대관식`이다. 이 그림은 다비드가 혼신을 다해 그린 그림으로 세로가 5.21m 가로가 9.79 m로 보기 드물게 큰 그림이다. 앞에 서면 우선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말 그대로 대작이다. 150여명이 등장하는 그림인데 등장인물 모두가 실존인물이다. 이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화가의 고민과 기막힌 표현이 재미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위를 온 천하에 보이기 위해 대관식에 교황을 초대하고 스스로 황제의 황금 관을 머리에 얹는다. 다비드는 이 특별한 대관식 광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는 어리석음을 택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황제의 으뜸가는 권위를 표현하면서 이 파격적인 대관식 모습을 잘 표현할 것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혁명 후 구테타로 제1공화국의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결국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상에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하고 다비드에게 그 일을 명령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키 작은 그를 크게 보이게, 이미 두 아이가 있고 6살이나 연상인 조세핀을 아주 예쁘고 젊게,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쓰는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나폴레옹이 부인에게 황후의 관을 씌어 주는 모습을 그린다. 조세핀이 무릎을 꿇고 나폴레옹이 황후의 관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교황이 무표정하게 서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황제인 나폴레옹이다. 대관식의 하이라이트는 상상 속에 더욱 빛난다. 황제의 권위를 최고로 높임과 동시에 교황의 권위를 형편없이 낮추는 모든 목적을 달성한다. 이 그림은 그래서 명작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그림이다. 다비드는 이 그림으로 나폴레옹 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린다.

사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세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로 평가 된다. 중세의 그림은 주로 문맹시대에 기독교를 알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종교화로서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자신이 여는 세상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소위 나폴레옹적인 그림이 필요했다. 그 선봉에 다비드를 궁전 화가로 세운 것이다. 왕권을 일반 대중에게 잘 알리기 위한 이 제도는 나폴레옹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화가 제도는 시대의 변화 즉 그림의 주문자 혹은 소비자의 변화에 따라 사라진다. 즉 산업혁명과 더불어 부의 재편성, 분배가 일어나고 신흥 계급이 형성되면서 이들이 그림의 주 소비자가 된다. 그림은 더 이상 왕권이나 권력의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왕궁, 귀족의 저택에 걸리는 시대에서 보다 낮은 계급의 저택에 그들의 부와 예술적 안목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림의 민주화라 할까?

텔레비전을 선두로 하는 매스미디어는 나폴레옹 시대의 그림을 대신하는 현대적 수단이다. 21세기형 궁전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현 정부의 정신을 대중에게 잘 알릴까를 고민한다. 얼마 전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의 연출이 그렇고 앞으로 있을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이들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다. 누가 누구에게 왕관을 씌어 주게 할까 고민하고 있다. 그리는 사람에 따라 왕관을 씌어 주는 사람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에 얹어지는 왕관을 감사히 받는 사람이 다를 것이다. 교황도 물론 달라진다. 서로 무릎만은 사양할 터인데 어떻게 하나?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미국도 우리도 북한도 궁전화가가 있고 이 화가들은 누가 누구에게 왕관을 씌어 주어야 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궁전화가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다른 화가들은? 파리의 왕립아카데미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이 시대도 부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다양한 로봇이 우리의 삶을 돕게 되고, 길에는 자율주행차가 다니고, 100세 시대가 희망이 아닌 현실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유독 궁전화가가 득실대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양한 그림을 원하는 소비자가 없는가? 이 시대에 누가 무릎을 꿇고 누가 왕관을 내리고 누가 박수를 치고 함께 하는 것만 중요한가? 신문이 모두 같고 방송이 모두 같은 그림을 내 보내는 것을 보면서 좀 다른 그림, 새로운 인상파, 후기 인상파, 추상, 다다이즘, 등이 우리를 찾는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왕관은 민주시민 것이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1시간 정도 차로 가면 베르사이유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의 많은 볼거리 중 하나는 단연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나폴레옹 대관식`이다. 이 그림은 다비드가 혼신을 다해 그린 그림으로 세로가 5.21m 가로가 9.79 m로 보기 드물게 큰 그림이다. 앞에 서면 우선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말 그대로 대작이다. 150여명이 등장하는 그림인데 등장인물 모두가 실존인물이다. 이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화가의 고민과 기막힌 표현이 재미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위를 온 천하에 보이기 위해 대관식에 교황을 초대하고 스스로 황제의 황금 관을 머리에 얹는다. 다비드는 이 특별한 대관식 광경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는 어리석음을 택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황제의 으뜸가는 권위를 표현하면서 이 파격적인 대관식 모습을 잘 표현할 것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혁명 후 구테타로 제1공화국의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결국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상에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하고 다비드에게 그 일을 명령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키 작은 그를 크게 보이게, 이미 두 아이가 있고 6살이나 연상인 조세핀을 아주 예쁘고 젊게,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쓰는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나폴레옹이 부인에게 황후의 관을 씌어 주는 모습을 그린다. 조세핀이 무릎을 꿇고 나폴레옹이 황후의 관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교황이 무표정하게 서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황제인 나폴레옹이다. 대관식의 하이라이트는 상상 속에 더욱 빛난다. 황제의 권위를 최고로 높임과 동시에 교황의 권위를 형편없이 낮추는 모든 목적을 달성한다. 이 그림은 그래서 명작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그림이다. 다비드는 이 그림으로 나폴레옹 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린다.

사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세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로 평가 된다. 중세의 그림은 주로 문맹시대에 기독교를 알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종교화로서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자신이 여는 세상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소위 나폴레옹적인 그림이 필요했다. 그 선봉에 다비드를 궁전 화가로 세운 것이다. 왕권을 일반 대중에게 잘 알리기 위한 이 제도는 나폴레옹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화가 제도는 시대의 변화 즉 그림의 주문자 혹은 소비자의 변화에 따라 사라진다. 즉 산업혁명과 더불어 부의 재편성, 분배가 일어나고 신흥 계급이 형성되면서 이들이 그림의 주 소비자가 된다. 그림은 더 이상 왕권이나 권력의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왕궁, 귀족의 저택에 걸리는 시대에서 보다 낮은 계급의 저택에 그들의 부와 예술적 안목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림의 민주화라 할까?

텔레비전을 선두로 하는 매스미디어는 나폴레옹 시대의 그림을 대신하는 현대적 수단이다. 21세기형 궁전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현 정부의 정신을 대중에게 잘 알릴까를 고민한다. 얼마 전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의 연출이 그렇고 앞으로 있을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이들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다. 누가 누구에게 왕관을 씌어 주게 할까 고민하고 있다. 그리는 사람에 따라 왕관을 씌어 주는 사람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에 얹어지는 왕관을 감사히 받는 사람이 다를 것이다. 교황도 물론 달라진다. 서로 무릎만은 사양할 터인데 어떻게 하나?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미국도 우리도 북한도 궁전화가가 있고 이 화가들은 누가 누구에게 왕관을 씌어 주어야 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궁전화가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다른 화가들은? 파리의 왕립아카데미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이 시대도 부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다양한 로봇이 우리의 삶을 돕게 되고, 길에는 자율주행차가 다니고, 100세 시대가 희망이 아닌 현실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유독 궁전화가가 득실대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양한 그림을 원하는 소비자가 없는가? 이 시대에 누가 무릎을 꿇고 누가 왕관을 내리고 누가 박수를 치고 함께 하는 것만 중요한가? 신문이 모두 같고 방송이 모두 같은 그림을 내 보내는 것을 보면서 좀 다른 그림, 새로운 인상파, 후기 인상파, 추상, 다다이즘, 등이 우리를 찾는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왕관은 민주시민 것이다. 김양한 KAIST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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