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겪은 치욕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킨 `사기`는 그래서 흔히 혼으로 쓴 역사, 피로 쓴 역사라고 한다. 사마천은 친구를 변호하다가 무제의 역린을 거스렀다는 이유로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겪고 나서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태사공자서`)라고 하면서 그 극단적인 절망감을 표출했다. 그리고 조상을 뵐 면목도 없어 부모님 산소에도 오르지 못했다.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고,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줄기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다"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기`를 통해 사마천이 던진 첫 메시지가 역사는 결코 착한 자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김득신이 무려 1억 번 이상 읽었다고 알려진 `백이열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백이와 숙제는 서로 왕위자리를 다투지도 않았고, 은나라에 반기를 들면서 아버지의 장례도 치루지 않고 전쟁을 일으켜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불의를 보고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는 선비다운 기개를 보인 자들이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이 이 때문에 없었다"라는 공자의 칭송에 의문을 품은 사마천은 그들이 지은 `채미가`의 마지막 구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운명도 다했구나!"를 인용하면서 "원망한 것인가, 아닌가?"라고 모호한 질문을 던지면서 보다 더 깊은 해석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뉘앙스로 남겨두면서도 불공정에 대한 원망(怨)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사마천은 다시 공자의 수제자 안회와 춘추시대 말기의 도적인 도척을 비교한다. 공자가 그토록 아꼈던 제자 안회도 "밥그릇이 자주 텅 비었고,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백이열전`)고 하면서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으로 베풀어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한탄을 드러낸다. 뼛속에 스며들 정도의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여유로운 군자의 삶을 살아간 안회에 비해 도척이란 자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짓을 일삼는 잔인무도한 도적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한탄은 이렇게 이어진다.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백이열전`) 이 구절에서 사마천은 불공정한 세상을 `혹(惑)` 즉 `미혹된다`는 단어로 압축하면서 `시비(是非)`의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자 하면서 그 무게중심은 역시 그르다는 쪽에 두었다.

사마천은 인과응보니 권선징악이니 하는 식의 잣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즉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백이열전`)고 한 말의 한계를 거론하면서 역사가 꼭 착한 사람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점을 이런 역사적 사례를 들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요즘에도 화두다. 우리 국민의 80% 이상이 느끼는 심각한 사회갈등의 유발요인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불공정한 현실 탓이리라. 대입제도와 로스쿨제도 등을 둘러싼 논쟁의 궁극은 불공정성 문제다. 이해관계를 떠나 냉철한 자세로 그 간극을 줄일 고민을 우리 모두가 해야 할 때다. 시간은 짧고 낭비할 시간은 별로 없다.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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