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6년(세조 2) 6월 사육신의 일원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박팽년은 거사 계획이 누설되면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의 일화이다.

"그의 재주를 높이 산 세조가 은밀히 자기를 섬기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며 구슬리자 웃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고 상감(上監)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를 이미 신(臣)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팽년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5번이며 별칭은 탐구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탐욕과 자신감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모든 관계에 있어 자신감과 높은 이상을 가지고 그 대상을 열정적으로 찾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신비스런 결합을 추구하며, 깊은 대화와 교감을 나누고자 한다. 이런 대상을 찾기 위해 상대방을 시험하며, 자기 표현에 주의를 기울인다. 예술 형태로 자신의 낭만적 기질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1417년(태종 17) 회덕에서 출생했다.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1438년 사가독서(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독서에 전념하던 휴가 제도)를 했다. 1453년(단종 1)에는 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충청도관찰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집현전의 뛰어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서체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사람들이 그가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추앙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문종으로부터 세자(단종)를 부탁받았던 신하 중 한 사람이었다.

"문종은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고 어탑(왕의 의자)에서 내려와 먼저 술잔을 들어 권하니,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이 모두 술에 취해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왕이 내시에게 명하여 방문 위의 인방나무를 뜯어다가 들것을 만들어 차례로 메고 나가 입직청(入直廳)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술이 깨니 온몸에는 담비털 갖옷이 덮여 있었다. 왕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다. 그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했다"(인물한국사).

에니어그램 5유형이었던 그에게 높은 이상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교감할 대상은 문종과 그의 정통성을 승계한 단종이었다. 1455년(단종 3)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는 결기를 보였고 성삼문의 만류로 후일을 기약하며 울분을 삼켰던 그였다. 그는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했다. 심지어는 부인마저 공신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참화를 겪으면서도 세조가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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