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인도에서 10년 동안 나눔공동체 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동창이 잠시 내 둥지로 날아들었다. 음식만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하고 오후만 되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힘이 쭉 빠지는 증상이 있어 내게 진찰을 받아볼 목적으로. 진찰만이 아니라 `피정(避靜)`도 겸해 나를 찾았다고 말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목요일 저녁 무렵 병원을 찾은 친구는 다음날 내시경검사를 비롯한 이런저런 기본적인 검사를 받았고,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토요일, 마침 쉬는 날이었지만 모처럼 나를 찾은 친구를 달랑 검사만 하고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까이 있는 야외로 나가 신선한 바람을 쐬며 함께 식사라도 할 요량으로 나는 잡혀있던 약속을 뒤로 미루고 친구에게로 향했다.

진료를 마친 토요일 오후의 병원 로비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병원으로 들어선 나는 친구가 누워있는 병실로 향하기에 앞서 부리나케 진료실로 향했다. 내 기대와 달리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뭐야, 실망을 넘어 와락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을 나서기 전 컴퓨터로 배송조회를 한 결과 물건은 이미 천안 하역장에 도착해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쯤이면 주문한 상품은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게 마땅했다. 나한테 택배 온 거 없어? 당직 근무를 서고 있는 원무과 여직원을 향해 퉁명스럽게 묻자, 없다고 했다. 혹시 외래 간호사가 물건을 받고 따로 보관해 둔 건 아닌지 알아보라고 하자 원무과 여직원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의 말인즉슨 아예 택배기사가 오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토요일에도 배달하잖아. 씩씩대는 나를 향해 원무과 여직원은 토요일에도 배달하는 건 맞지만 지금까지 안 오면 월요일에나 물건은 도착한단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겨 못 오면 다른 직원이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투덜대며 털레털레 친구의 병실로 향했다.

독립기념관 인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좀 더 깊숙한 곳으로 찾아들어 갔다. 저 너머 저수지를 끼고 돌면 한적한 시골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게 세련되고 근사한 커피숍이 있었다. 커피숍도 커피숍이지만 이런 시골구석까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라니, 친구는 입을 쩍 벌린 채 마냥 신기해하며 연신 고개를 흔들어댔다. 인도의 오지에 살던 인간에게 어딘들 근사하지 않으려고. 저수지가 건너다보이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한가로이 커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 갔다. 너 정말 몸이 불편한 거 맞냐? 그렇다니까. 조금 전 나와 식사할 때 보니까 잘만 먹더구먼. 그런 나를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몇 숟가락만 뜨면 가슴이 답답해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내가 보기에 다른 건 없고 마음의 병이다. 그런가 보네. 한 고집 하는 친구는 그답지 않게 순순히 내 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뭐가 좋아 인도에 10년씩이나 머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금도 가지 못해 안달이냐? 좋긴, 40도 가까운 더위에 자다 보면 천장에서 쥐가 툭툭 떨어지기도 해. 언젠가는 야생식물을 잘 못 먹고 병원으로 실려 가 죽다 살아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한국 사람들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기가 다반사지.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난 그곳에 있을 때 몸도 마음도 가장 편해. 이후 친구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뜻하지 않게 일이 생겨 출국날짜가 차일피일 미뤄진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 계획한 일도 틀어져만 가고. 결국 인도에서의 나눔공동체 생활이 그립고 그 기다림이 길어져 생긴 마음의 병임이 자명해 보였다.

"친구야, 넌 뭘 기다리며 사니?"

"으음, 나야 뭐 물건이나 택배기사를 기다리며 살지."

친구가 내게 물었다면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지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가난한 대답인가. 함께 있는 내내 친구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은 없지만 이다지도 마음이 헛헛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남호탁 수필가·예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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