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도시 대전으로의 시간여행] 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을 일제는 회덕에 있던 군청을 지금의 원동으로 옮겼다. 군청의 이전과 함께 대전역과 원동 일대는 도시화가 더욱 가속화됐다.

이에 우암 송시열이 거처를 삼았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던 소제호 주변, 현 소제동의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었던 이곳에 `일본거류민회`가 1907년 신사를 세우변서 변화가 시작됐다.

대전의 도시계획의 핵심은 하천정비에 있었다. 1912년 대전천을 시작으로 1914년 지금의 신안동 일대의 대동천까지 확장됐다. 대전천 제방공사로 약 1만 8000여 평의 하천부지가 대지로 바뀌었다.

이후 1927년 소제호가 매립된 뒤 그 부지 위에 철도관리자와 노동자들을 위한 거대한 관사촌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는 완전히 깨지게 됐다.

대전역 건설과 도시계획의 진행에 따라 `철도도시`로의 발걸음을 내딛은 대전은 대전천과 대전역 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시가지를 확장해 나갔다. 인동·효동으로 이어지는 인효로를 본정통, 반대쪽 삼성동 방향 길을 영정통이라 불렀으며 다시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사로 이어지는 중앙로를 춘일정통 이라 했다. 이 세 도로가 근대 대전의 축으로 현재의 원도심을 이뤘다.

대전역 건설 이후 대전역 맞은편 시가지는 대전의 `경제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대전 경제의 축이 됐던 두 건물은 1918년 설립된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과 1922년 12월 준공된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었다.

두 건물 모두 일제의 식민정치를 대표하는 건물로, 한국의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해 설립됐다.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식민금융자본이다. 대한제국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됐으며, 광복 후 한국 식산은행으로 개칭됐다. 이어 1954년에는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됐으며 현재는 안경원 건물로 쓰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양식을 취하고 있는 이 건물은 폭과 높이의 비가 2대 3으로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상부의 수평 돌림띠를 통한 수평선을 강조하며 출입구와 창문 주위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현재 건물 내부는 층이 나눠져 있지만 건축 당시에는 13m 높이의 단층이었다. 높은 천장은 철판으로 마감 후 석고를 입힌 궁륭형으로 꾸며져 들어서는 이들에게 압도적인 공간감과 함께 식민자본의 화려함을 느끼게 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은 1921년 4월에 개설돼 1922년 강경과 수원의 지점을 통폐합한 뒤 옮겨온 것으로 1920년대 대전의 지정학적 또는 경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조치였다. 동시에 조선의 철도망이 완성돼 가면서 지역의 헤게모니가 과거 항구도시에서 내륙 철도도시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이 건물은 민간에 매각돼 상업시설로 쓰이고 있으며 지금까지 전국에 남아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부산과 목포, 대전 단 3곳 뿐이다. 부산과 목포에 있는 모두 근대역사관으로 변모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역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대전이 근대도시로 도약함에 있어 두 건물의 미친 영향력을 볼 때 그 가치가 매우 크다"며 "두 건물 모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산으로 민간에서 이용하는 상업시설로 이용되고 있지만 대전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그 역사성을 알리리려는 대전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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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은행대전지점 내부
식산은행대전지점 내부
식산은행대전지점
식산은행대전지점

서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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