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소설 중에는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 곁을 지키면서도 아버지가 죽든 말든 자신이 좋아하는 메이저리그 야구팀의 경기 결과를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소년이 나오는 소설이 있고 택시운전사인 남편이 아내를 조수석에 태우고 다니면서 남자 손님에게 매춘을 시키는 소설도 있다. 풍속이 어지러운 옛날이 아니라 2000년대를, 그러니까 우리 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내가 쓴 또 다른 소설에는 동생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죽은 이후 동생의 아내를 연모하고 욕망하는 남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아무래도 이들은 지탄과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학의 윤리가 사회의 공동체적 윤리와 거의 등가적으로 치환되는 요즘의 시각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비판자들은 사회적 금기를 해제하는 소설이 아마도 판단에 관여하는 독자의 이성에 해로운 영향을 미쳐서 공동체의 질서를 약화시킬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마광수나 장정일을 처벌한 법원의 논리가 모두 그러했다) 그런데 어떤 미련한 독자가 있어 소설을 읽고서 `나도 아내를 택시에 태우고 다니면서 매춘을 시키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어떤 아둔한 독자가 있어 `동생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동생의 아내를 욕망하겠다`고 마음 먹을까. 문학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어떤 심술궂은 작가가 있어 작품을 통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부추긴다고 해도 작가의 의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가 이상적으로 공유하는 윤리는 이미 강렬한 강령으로 우리 사회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윤리를 교란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윤리라는 이름이 감추고 있는 억압성을 교란시키는 존재다.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말을 또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게 서글프지만 문학 작품은, 특히 서사적 개연성 안으로 독자를 유도하고 흡인하는 소설은 금기를 선험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무의식 속에 도사린 욕망과 대면하게 하면서 당대적 윤리와 도덕률에 동시대인들이 섬세한 동의 절차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런 절차를 생략하고 제정된 도덕률이란 언제라도 개별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관념적인 전체의 선을 추구하면서 사회의 기도를 폐쇄할 위험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 폐쇄된 기도를 열어주어 우리 사회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금기를 다룬 문학작품은 시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씌어진다. 예컨대 그 유명한 `롤리타`나 `소돔의 120일`도 그렇지만 이언 매큐언의 `시멘트 가든` 같은 소설 역시 당대의 금기에 작용하는 무의식을 집요하게 해부한다. `시멘트 가든`의 사남매는 부모가 차례차례 죽자 별다른 죄의식 없이 어머니를 시멘트로 암매장하고 감각적인 유희를 추구하면서 성적인 방탕과 근친상간에 이른다. 역시나 현실에서라면 이 남매들의 행위는 이해받을 수도 없고 옹호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충격은 당연히 윤리의 해체나 무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윤리적 기준이 와해되었을 때 인간의 무의식이 어떻게 내파되는지를 묘사함으로써 윤리와 욕망이 가질 수 있는 질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이 소설이 쓰여진 이유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렇게 금기를 깨뜨리면서 문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다. 왜냐하면 그 사회가 금기와 길항하고 허용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가치의 내포를 강화하고 외연을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문학이 반드시 옳은 것을 옹호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문학은 초월과 무의 세계에 끊임없이 닿으려고 노력한다. 예컨대 궁극적으로 패배하고 실패하는 세계를 지향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문학도 있다), 옳은 것을 옹호할 때조차도 그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옳은 것을 정직하게 옳다고 말하는 방식도 그 중 하나이고, 옳은 것이 어떻게 비참하게 모독당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도 그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옳은 것을 말하는 작가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제발, 한 가지 방식만 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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