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안한다. 한정된 것, 즉 유한한 범위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 생각해보자고. 무한히, 정보의 바다에서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파도에, 동조에, 그저 휩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 머리말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이론을 기반으로 이 시대에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방향이나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인식론적 혹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나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빠르고 복잡하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 역시 빠르게 지나간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은 각각의 상황에 어울리는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때로는 액수가 정해진 부의금과 조문으로, 때로는 슬픔에 공감하는 공통적인 표현의 댓글로. 나의 상처와 고통만 오래 남는다. 타인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안에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공격적이고 억압적이다. 한편에서는 `워라밸`(work life balance)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그 마저도 압박으로 다가온다.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처세술을 넘어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이에 대해 지바 마사야는 `중단`과 `한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유한성을 깨닫는 일과 시대가 강요하는 흐름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한계는 물질성에서 비롯된다.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유한성을 넘어 무한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지금 타인이 방문한 장소와 맛보는 음식은 그만의 유한성에서 가능한 결과이다.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왜곡된 믿음이다. 이 믿음을 벗어나는 일은 어렵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멈추는 일이다. 멈추는 것은 중단하는 것이며, 나아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다. 일상의 작은 습관부터 노동이라는 영역에 이르기까지. 유한성을 규정하는 맥락과 위상을 파악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의 삶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산 속의 `자연인`으로 산다 해도 마찬가지다. 연결은 학연이나 지연, 혈연처럼 어쩔 수 없는 현실인 측면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시도하는 연결도 존재한다. 연결은 `장`(field)을 형성하면서 개인을 압박한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과 벗어나려는 사람이 있다. 연결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순간, 그것은 우리를 옥죄어 온다. 그러한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은 관계를 망치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시대는 촛불 혁명과 같은 특정 국면 이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통제하고 억압하고 무너뜨리는 온갖 지배체제들을 걷어내야 한다. 그러한 체제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개인들이 음습하고 탐욕스러운 조직을 만들고 유지해왔다. 그래야만 개인의 욕망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불거지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과정에서 겪는 피할 수 없는 진통이다. 새로운 시대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조직과 개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개별 규칙을 바꾸는 일이고, 나아가 배치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개인의 경험이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동체의 경험의 총합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건강한 개인들이 건강한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은 중요하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은 `개인`이다. 자신이 속한 가족과 조직, 사회의 `시대정신`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키워야 한다. 지바 마사야가 강조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누리고 유지했던 것을 무너뜨리는 `상실의 공부`, 사회의 주류와 불화할 수 있는 `바보의 공부`.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열심히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어딘가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잘 파악하고 어디를 향해 갈 것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진짜 공부를 해야 할 때이다.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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