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족과 함께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투명한 하늘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눈부신 에메랄드색 바다는 그동안 쌓인 육아의 피로와 연일 계속되는 미세먼지에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덕에 `아시아의 하와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오키나와는 단순한 관광지는 아니다. 실상을 알고 보면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아직도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갈등의 현장이다.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오키나와 중부 기노완시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사키마미술관이었다. 3면이 미군 해병대 항공 기지인 후텐마 기지로 둘러싸인 미술관은 일본 주둔 미군기지 약 70%에 해당하는, 본토 15%가 미군기지로 점유된 오키나와의 현 상황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전쟁을 기억하고 평화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의 대표적인 소장품인 마루키 이리와 마루키 토시 부부의 1988년 작 `오키나와전도`는 오키나와 전쟁 당시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끼어 자결로 내몰린 주민들의 비극을 그려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대작이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죽인 처참한 상황은 일본군의 강요에 따른 것으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과 불신이 그 이유였다. 군부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에겐 더 가혹했는데 이 그림 속에는 조선인 구씨 일가족 학살 장면도 그려져 있다. 실제로 조선에서 오키나와로 강제 연행되어 희생된 조선인 군인과 위안부들은 이들이 몇 명인지, 누구인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후 이같은 비극에 대해 오키나와 인들은 오랜 기간 입을 다물었는데, 피해와 가해가 중첩되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증언이 하나 둘 이어졌고 마루키 부부는 이를 토대로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작품 맞은편 벽면에는 오키나와의 참상을 증언한 인물들의 얼굴 사진이 따로 부착되어 있다.

`오키나와전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4·3사건이 생각났다. 제주 사람들 역시 당시 받은 충격과 상처로 말문을 닫은 경우가 많으며, 최근 진상규명을 통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편이지만 실제 사건의 부분에 불과하다. 지금도 일본 정부는 과거 오키나와 참상과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있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평화를 위해 미군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미군기지를 철수시키기 위한 투쟁을 한창 진행 중이다. 제주 역시 10년 넘게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와 제주의 일상 풍경에는 아직도 아픔이 배어 있다. 그래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더없이 처연하다. 이슬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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