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 공동체에 나타나신 사건에 대한 기록인 요한 20,19~23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주간 첫 날 저녁은 유다인들이 안식일이 끝나고 활동을 시작하는 때이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받쳐 따랐던 스승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스승과 같은 운명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모두 잠가 논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은 특정한 민족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은 분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세상의 우두머리를(요한 12,31)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요한 15,19) 세상에서 복음은 약하고, 무시 받고, 비천한 것이다. 세상에서 강하거나, 인정받거나, 고귀한 것은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닫힌 문을 뚫고 오시어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의 고백 이전에(요한 20,28)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들어내신다. 행복과 구원은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고 완성시켜 나가시는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님을 분명히 들어내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해 지거나 구원받으려는 열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러한 열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추구할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주님이시오, 하느님이신 분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 대한 불신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부터 행복과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마저도 자신을 채우고, 성장시키려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악마는 악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악마는 늘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파견 받으신 것처럼 예수님께 파견 받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인 것처럼(요한 14,9), 사람들은 그분의 제자들의 말과 행동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분을 체험하게 된다. 그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주신 `성령`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평화`를 선포하신다. 세 번째 `평화`는 부활의 증인인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이 가는 모든 곳 마다 선포될 것이다.(루카 10,5)

당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십자가 위에서 봉헌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아버지께 로부터 영광스럽게 되셨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서로의 관계 안에서 태초부터 존재했었던 것이다. 삼위 하느님께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고, 서로가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신비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 관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까닭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성 아우구스티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여기서 말하는 그분의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조건과 제한이 없는 그 사랑은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은 행복과 구원의 주권은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다.(마태 28,20) 구원은 특정한 누군가만 소유하고 있거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은 두 손과 옆구리에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불안과 고통, 그리고 절망에 대한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삶의 한 측면인 불안과 고통, 그리고 절망을 피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다. 온전한 구원은 삶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구원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로마 8,28) 안다. 부활의 승리의 기쁨과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길 기도해본다. 오창호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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