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정종 2) `2차 왕자의 난`에서 패한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은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이 때 정종이 이방간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토산은 동북면에 왕래하는 땅이고,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정종실록` 2년 2월 13일)"(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

정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식욕·참여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식욕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으로 신체적·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편안함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소속된 집단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조화를 위하여 갈등을 회피한다. 너그러우며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조선의 제2대 왕인 그는 1357년 (공민왕 6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1392년(태조 원년)에는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8년(태조 6) 8월에는 `1차 왕자의 난`의 결과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9월에 마흔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려 시대에는 부친인 이성계의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이었다. 청년 시절부터 부친을 수행하여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였고, 선대부터 동북면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가병 세력를 통솔하는 후계자이자 실력자였다.

그는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격살된 후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면, 청하건대 신들에게 죄를 주십시오"라며 공양왕을 압박했다고 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 그도 이 사건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차 왕자의 난 때 태조가 "`이방원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 없다`며 정종에게 하소연하자,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고 전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 국왕).

관대하고 이타적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자 하는 9번 성격유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부친인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없었다면 원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며, 왕위도 치열한 권력 다툼의 결과로 다가온 것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아직 왕조 국가로서의 기틀도 확립되기 전이었다. 그도 충분히 권력다툼의 한 복판으로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9번 유형인 그는 갈등과 분열보다는 조화를 택했다.

그는 1400년(정종 2) 2월에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이어 11월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개국 초기 그의 역할을 마쳤다. 그는 이후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19년 간을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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