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 대에는 그의 조부인 순조 대부터 이어진 안동 김문과 풍양 조문 간의 세력 다툼이 더욱 치열해졌다. "야사에는 한성판윤과 예조·이조·공조판서를 지낸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헌종이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했다고 전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헌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1번이며 별칭은 개혁가다. 그의 성격특성은 분노와 열의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행동 방식을 지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일에 열의를 보이며 타인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한다. 세상의 불완전함에 대한 분노는 변화와 개혁에 집중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와 풍양 조문의 신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는 세자인 부친이 요절하고 이어서 조부인 순조가 승하함에 따라 여덟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임금이었다. 따라서 순조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불가피하였고 그의 나이 열다섯 살까지 이어졌다.

헌종의 치세에는 각종 재해가 빈발하고 그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에 대한 대응이 절실한 시기였다. 이른바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이 흔들리고, 세도정치의 여파로 매관매직이 횡행했다. 신분 상승을 위한 백성들의 열망은 양반 중심인 조선사회의 질서를 위협할 정도였다.

선대부터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계속되어 1839년(헌종 5)에는 선교차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신부와 정하상 등이 처형되었다. 기해박해였다.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했고, 1846년(헌종 12)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을 처형했다.

1846년 풍양 조씨인 조만영의 죽음으로 안동 김문의 세도가 기승을 부리자,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을 유배보내고,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과 5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면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거부하면서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조선사회에서 붕당정치가 나름대로 왕권을 축으로 정파 간의 권력이동의 특징을 보였다면, 세도정치는 왕조국가의 정치체제를 극도로 왜곡시키는 권력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는 위험성이 컸고 과단성을 요구하는 정치행위였다. 비정상의 정상화. 1번 성격유형인 헌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깊어진 세도정치의 뿌리는 그에게 버겁기만 했다. 재위기간 중 사회적 모순을 바로잡고 민생안정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권력투쟁에 매몰된 관료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두 차례의 허접한 역모가 발생할 정도로 왕권은 권위가 떨어져 있었다. 외세의 틈입과 사회 문제에 대한 정책이 부재한 조선사회는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뿐이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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