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아침이 환하다. 창밖 목련나무에 희고 붉은 꽃이 가득하다. 꽃을 시샘하는 추위도, 눈을 흐리고 숨을 가쁘게 하는 먼지도 아랑곳없다. 자연은 한결같다. 나무를 부추겨 꽃피는 힘을 잃지 않는다. 이 꽃은 어떻게 피었는가. 이 봄은 어떻게 왔는가.

"고통스러운 삶을 나는 중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고통에 찬 야만 속에서 새로이/ 이마를 내밀어 빛을 느낀다./ (중략)/ 수백 번 찢겨도 참을성 있게/ 가지에서 새로운 잎을 돋우니/ 모든 슬픔에도 나는/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한다!"(헤르만 헤세, `가지 친 떡갈나무` 중에서)

봄이 저절로 온다고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날마다 우리를 찾는 "고통에 찬 야만" 속에서, 슬픔으로 이루어진 "이 미친 세상" 안에서 "이마를 내밀어 빛을 느끼는 마음"이 꽃을 피운다. 두 달 전 겨울이 아직 맹렬할 때 나는 따스한 오후 햇살을 즐기려 산책 가다 보았다. 장례 행렬처럼 늘어선 나무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목련 가지가 꽃눈을 슬쩍 달고 있는 것을.

나무는 잎이 질 때 이미 꽃을 품고 있다. 자연은 겨울에 벌써 약동하는 봄을 일으킨다. 죽음을 견디는 투쟁 없이 생겨나는 생명은 없다. 꽃이 우리를 즐겁고 기쁘게 한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우리가 인생의 추위를 참았기 때문이다. 봄이 우리를 행복하고 희망차게 한다면 끈질긴 좌절 속에서 우리가 삶의 고통을 이겼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한다.

"가혹한 세계에서 겨울밤을 보냈기에/ 순수한 그대 곁에서 이 봄을 누릴 수 있다./ (중략)/ 우리의 봄은 올바른 봄이다."(폴 엘뤼아르, `봄` 중에서)

봄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올바른 봄", 즉 시인의 봄은 따로 있다. 절망이 줄을 잇는 "가혹한 세계"에서 축축하고 얼어붙은 겨울밤을 보낸 후에야 찾아오는, "순수한 그대 곁에서" 누리는 `사랑의 봄`이다. 이 봄에는 죽음이 삶을 침습하지 못한다. 시인은 "사라지는 그 무엇도 그대에게 힘을 미치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인생의 변화가 "올바른 봄"이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닌 듯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이것이 시인의 한숨을 불러들인다.

"모든 것이 늙었다가 다시 젊어진다. 어째서 우리는 자연의 경이로운 순환에서 빠져 있는가."(횔덜린, `휘페리온` 중에서). 살아 있음은 곧 죽어감이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여자들은 가랑이 사이로 무덤을 낳는다. 예외는 없다. 변화는 존재의 유일한 형식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부서져 사라진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세계에 있는 한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불멸의 힘은 생명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경이로운 비밀은 불사가 아니라 불로에 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일직선의 시간을 둥글게 말아서 순환하는 원을 만드는 것에서, 한살이를 지낸 늙고 약한 가지가 젊고 싱싱한 잎을 틔우고 꽃을 밀어내는 일에서 우리는 기꺼이 구원을 본다. 이것이 봄의 비밀이다. 우리가 봄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살아갈 힘을 나누어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쇠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목련이 피었다 지겹다 아프다 힘들다 목련이 피었다 먼지가 많고 밤에는 비가 내릴 예정입니다 목련이 피었다 미안해 고마워요 잘 지냈지 잘 지내요 목련이 피었다 지금 몇 시지 그게 언제지 목련이 피었다 도망치고 싶어서 목련이 피었다"(유희경, `합정동` 중에서)

피어 있는 목련 앞으로 무수한 말들이 흘러간다. 우리는 지겹고 아프고 힘들다. 숨 막히는 대낮 다음에는 축축한 밤이 올 것이다. 안부를 주고받는 일상이 무참히 지나간다. 특정할 수 없는 시간을 비인칭으로 살다가 덧없이 스러진다. 아아, 이 삶이 우리 인생이 아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목련이 사이사이 피어난 것이다. "도망치고 싶어서", 황량한 이 삶을 벗어나고 싶어서 말이다. 이 봄, 목련이 다시 피었다. 상실에서 회복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움직인다.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기적인가. 장은수 편진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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