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순조 1) 순조가 `아무리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라며 공노비 6만 5000명을 해방시키라는 명을 내렸다…말년에 안동 김씨에 거슬리는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자 순조는 `우리가 백성들 먹여 살리려고 정치하는데 오늘 나는 어찌 죽이거나 탄핵하는 말 말곤 한마디도 들은 게 없는가`라고 탄식하며 왕권으로 김노경(추사 김정희의 부친) 등 반대파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순조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융합·참여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관대하고 이타적이며 타인을 배려하고자 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없는 존재감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타인의 태도,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들면서 그 대상과 융합하고자 하며 정체성 문제를 겪기도 한다.

1790년에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는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정조가 승하하자 열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시작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그의 나이 열다섯 살까지 이어지면서 천주교도와 벽파에 반대하는 시파, 남인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신유박해로 정약용 형제와 이승훈 등이 이 때 화를 입었다.

1804년(순조 4)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그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안동 김문에 의한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다. 이들이 자신들을 핍박하던 벽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과 사회기강의 문란이 뒤따랐다. 탐관오리의 횡포와 백성들에 대한 수탈 등 그동안 쌓인 적폐는 잦은 민란의 원인이 되었고, 마침내 1811년(순조 11) 서북지방을 근거지로 한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약 5개월 간 전국을 흔들면서 후기 조선사회의 쇠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풍양 조문에서 며느리를 들이고 1827년(순조 27)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며 안동 김문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또 다른 세도정치체제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안동 김문의 세도정치-세자의 대리청정-풍양 조문의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대리정치체제가 지속된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주도적인 정국 운영보다는 타인과의 융합을 통한 간접적인 왕권 행사를 마다하지 않은 그의 성격 특성과 무관치 않았다.

이 시기에 급속히 세가 확장된 천주교는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사회의 지배논리를 위협하고, 이미 싹튼 민중의식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익추구에 몰두하는 지배 세력들에게 변화의 요구를 담아낼 공간은 없었으며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뿐이었다.

9번 유형들은 자신만의 의제와의 연결이 어렵다고 느낄 때 종종 타인의 감정과 의견으로 대치하고자 누군가와 융합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혼란을 겪기도 한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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