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에서 한강과 비슷하게 드넓은 지롱드(Gironde) 강을 따라 바다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오메독(Haut-Medoc) 지역의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마고(Margaux) 마을 지나 쌩줄리앙(Saint-Julien)과 쌩떼스떼프(Saint-Estephe) 사이에 위치한 뽀이약(Pauillac) 마을을 만나게 됩니다. 5개뿐인 메독 1등급 와인 중 3개나 품고 있는 뽀이약은 메독을 대표하는 와인 마을로 유명합니다. 오랜 기간 침식과 퇴적을 반복하며 석회암 및 이회토층 위에 형성된 자갈 토양으로 배수가 아주 잘 되기에, 포도나무 뿌리가 깊숙이 파고들면서 다양한 성분을 섭취하여 와인 맛에 다양한 복합성을 띠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쌩줄리앙은 부드럽고 섬세한 와인을, 쌩떼스떼프는 터프하고 견고한 와인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3개의 1등급 뽀이약 샤또 중에 남쪽의 쌩줄리앙에 접한 샤또 라뚜르(Latour)는 오히려 강건함을, 북쪽 쌩떼스떼프에 근접한 샤또 무똥 로칠드(Mouton Rothschild)와 샤또 라피트 로칠드(Lafite Rothschild)는 반대로 섬세하고 조화로움을 지닙니다. 앞선 칼럼에서 소개드렸던 2016년 여름 와이너리 투어시 방문했던 3개 뽀이약 샤또들(린치바쥬, 뽕떼까네, 피숑바롱)과는 달리 1등급 샤또들은 짧았던 준비기간에 방문 예약이 불가능했기에, 지나치며 구경만 가능했습니다.

샤또 라뚜르는 샤또 피숑 라랑드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한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탑(tour)의 윗부분만 볼 수 있었습니다. 와인 라벨에 그려진 700여년 전까지 존재했다는 탑처럼 사면이 첨성대와 비슷하게 경사진 요새형이 아니라, 위아래 간격이 동일한 일자형의 단순한 형태입니다. 샤또 라피트는 와이너리 둘레를 따라 길이 나있었기에 라뚜르보다는 더 자세히 샤또와 포도원을 담장 너머로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샤또 무똥 로칠드는 입구는 물론 담장도 없기에 건물 주변과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꼼꼼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클래식와인 정모에서 오메독 와인들을 돌아가며 시음하고 있는데, 뽀이약 와인들도 5회에 걸쳐 맛보았습니다. 샤또 무똥 소유의 5등급 샤또 다르마이약(d`Armailhac)과 샤또 클레르-밀롱(Clerc-Milon)도 1등급 와인과 비슷한 관리를 받아서인지 슈퍼 세컨 와인 수준에 비견할 만했습니다. 와인평론가 젠시스 로빈슨과 휴 존슨은 샤또 무똥의 자금력에 힘입어 영광의 빛을 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마찬가지로 샤또 라피트도 4등급 샤또 뒤아르-밀롱(Duhart-Milon)을 관리합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시 김정일이 만찬에서 대접했던 와인으로 유명세를 탄 샤또 라뚜르는 맛의 강건함에 김정일이 좋아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2000년대 초반 프랑스 출장에서 저렴하게 공수해서 보관하다가 홀인원 기념으로 2011년에 나눠마셨던 샤또 라피트 1999은 당해년도 6월에 있었던 개기일식을 기념하여 와인병에 일식 장면과 빈티지 숫자를 새겨 넣은 독특함에 더불어 명성대로 섬세함과 우아함으로 균형 잡힌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맛볼 행운이 있었던 화려한 샤또 무똥은 2015년 3월에 맛본 1982년 빈티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30살이 넘었음에도 아직 쌩쌩하더군요. 30~40년 더 숙성시켰다가 마시면, 정말 완벽한 맛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텁텁한 담배향에서 달콤함 체리향까지 변해가는 향취도 멋졌습니다.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밀레의 만종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라는 칭찬을 받았는데, 같이 마셨던 분의 표현도 멋졌습니다. "밀레의 만종은 추수 끝나고 해가 내려앉을 쯤인데, 이 아이는 해 쨍쨍한 낮이었어요. 노을 지는 저녁의 느낌까지 받으려면 정말 3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신성식 ETRI 미래전략연구소 산업전략연구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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