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운전면허를 가진 모든 사람은 10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적성검사를 받고 운전면허를 갱신해야 한다. 적성검사는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으로 구속과 책임이 뒤따른다. 운전면허라는 게 일종의 수행 가능한 기능에 대한 자격증이므로 10년 사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운전을 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는 장애가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국가가 검사하고 운전면허를 재발급해 주는 취지다. 예컨대 그 10년 사이 발병에 의해 판단 능력을 상실하거나 실명을 할 수도 있고, 팔이나 다리를 못 쓰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나도 마침 지난 달 적성검사 기간이 돌아와 10년 만에 적성검사를 받으러 운전면허시험장에 다녀왔다. 적성검사는 보통 시중의 병원에서 대행을 하는데, 검사 대상자들의 편의를 위해 권역별 대형 운전면허시험장 안에는 적성검사장을 갖추고 있다. 그날 두 가지 인상적인 게 있었다. 하나는 운전면허시험장에 도착해서 검사를 받고 새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까지 20분밖에 안 걸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검사장 안에서 내가 받은 건 시력검사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 10년 전 적성검사를 받을 때는 손이나 팔, 손가락, 목의 움직임 같은 것도 감독관 앞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처리 결과를 기다리며 한 시간 넘게 대기하다가 새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10년 사이에 절차가 놀랍도록 간편하게 변해 있었다. 아마도 검사관은 내가 검사장 안에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온 것과 자기가 지시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 듣고 시력 검사에 응한 것 등을 삽시간에 관찰하고 나의 다리와 팔의 기능, 청력 등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행정 서비스가 신속하게 이뤄지는 걸 마다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 그러니까 정교함을 누락한 신속함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끔찍한 교통사고들이 하루에도 수백 건씩 일어나서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는데 대개 졸음운전 아니면 운전미숙, 차체 결함 등이 사고의 원인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게 전부일까. 신체적인 장애를 안고 있는 운전자 중 적성검사를 허투루 통과한 자들이 운전 중 적절한 신체적 작동이나 반응을 못해서 사고를 내는 경우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대표적인 고령 국가인 일본 같은 경우, 신체의 전반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노인 운전자들이 일으키는 교통사고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행정 편의에 대한 민원의 압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신속하게 처리할 게 따로 있지 사람의 안전과 직결된 운전에 필요한 종합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지 검사하는 걸 그렇게 생략해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쓰면 이건 일종의 부실한 국가 행정에 대한 고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사회 도처에 편리하니까 고발 없이 통용되는 행정 서비스가 곳곳에 또 얼마나 많을까. 예컨대 공공 목적 건물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소화기 점검이나 개인 가구를 대상으로 치러지는 도시가스 점검 같은 것도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물론 정석대로 꼼꼼하게, 융통성 없이 국가 행정을 집행하면 당장은 민원 당사자들의 원성을 살 것이다. 그래서 계속 편의 위주로 행정 서비스가 간편화됐을 것이다. 그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안전과 관련된 행정 서비스를 이토록 허술하게 처리하는 건 국민들에게 독이 든 잔을 건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국가가 가진 권위와 구속력이 국민을 억압하거나 귀찮게 괴롭히는 데 쓰이면 그것은 분명 국가의 폭력이다. 하지만 그 권위를 좋은 데에, 안전한 데에 쓰는 건 결코 폭력이 아니다. 그리고 민원의 당사자인 시민들도 당위에 따른 불편이라면 불평을 할 게 아니라 마땅히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엔 그것이 바로 교양이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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