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년 11월 25일의 실록은 계유정난 이후 단종이 경복궁 자미당(세종이 말년에 거처했던 곳) 난간을 보더니 서서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단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6번이며 별칭은 충성가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두려움과 의무·온화함이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지침, 규율, 기준을 알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안내할 훌륭한 권위를 찾기도 한다. 이 권위는 사람, 사고시스템, 지식일 수 있다. 자신을 보호해 줄 타인을 찾아 친근감을 표시하고 의존하려 한다.

1441년(세종 23) 세자 시절의 문종과 세자빈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생모가 출산 3일 만에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고, 조선 왕조에서는 유일하게 적장손으로 태어나 원손-세손-세자의 단계를 거쳐 왕위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즉위했을 때는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왕대비의 수렴청정이 필요했으나 그의 주변에는 그런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세종,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 그를 보좌했고 수양대군, 안평대군 같은 삼촌들도 가세했다. 취약한 왕권을 대신과 종친이 나누어 갖는 형국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황표정사(黃標政事)였다. 주요 대신이 인사후보자를 추천하면서 특정 인물 옆에 노란색 표기를 하면 왕이 그대로 추인하는 변칙적인 인사행정이었는데, 안평대군도 문신들과 제휴해 이에 관여하자 수양대군의 주도로 폐지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강성한 대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권세가와 종친의 집을 방문해 인사청탁하는 분경을 금지하자 지지세력 결집이 여의치 않게 된 수양대군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재개되어 그의 권력 강화에 활용되었다.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 와중에 "`동각잡기`는 단종이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했다고 전한다. 재위 2년에는 `숙부는 과인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희공(姬公:주공)으로 하여금 주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한다"(이덕일, 2010).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에게는 확실한 정치적 후견인이 없다는 약점과 우월한 정통성이라는 강점이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6번 유형인 그는 우선 고명대신들에게 의지했고 다음에는 자신에 대한 위협을 예방하기 위해 수양대군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권위에 의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권력욕은 이미 단종의 기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육신록(六臣錄)은 `밤에 수양대군이 철퇴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내 실로 왕위를 원함이 아니로소이다`라면서 물러났다고 전한다"(이덕일, 2010).

6번 유형의 두려움은 자신감에 기반한 냉철한 현실 인식보다는 안도감을 갖는데 필요한 권위를 찾도록 추동하고 종종 안타까운 결말로 이끌기도 한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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