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이∼탕탕.`

깻잎머리에 베레모를 실핀으로 고정하고 제복을 입은 버스 안내양이 생긴 것은 1920년대 후반이다. 당시 서울에서 `부영(府營) 버스`가 운행되면서 처음으로 여차장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1961년 교통부장관이 `여차장제`를 본격 도입하자 전국의 시내·시외버스에서는 버스 안내양을 쉽사리 볼 수 있었다.

버스 안내양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단체 숙소에서 겨우 4-5시간 눈을 붙인 뒤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매일 차창에 매달리는 곡예를 하고, 때로는 돈을 숨긴다는 의심까지 받으면서도 애환이 서린 직업을 묵묵히 감당했다. 일은 고됐지만, 자부심은 대단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요구되는 데다 경쟁자도 많아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가 실시되고, 정류장 자동 안내방송과 하차 벨, 자동문 등의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안내양은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1989년 버스에 안내원을 필수로 탑승케 한다는 법 조문마저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는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됐다.

역사속으로 사라졌던 안내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다. 2006년 충남 태안군이 처음으로 버스안내양 제도를 도입한데 이어 옥천, 영동이 장이 열리는 날이면 버스 탑승 도우미를 배치해 승객들의 승하차를 돕고 있다. 다음달부터는 세종에서도 전통시장이 열리는 날짜에 맞춰 3개월동안 어르신들을 위한 버스 승하차 도우미를 배치한다는 소식이다.

자동차 때문에 인력거들이 일자리를 잃고, 자동화 시스템 때문에 안내양들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난리를 쳤지만 문명의 흐름은 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과거 버스 요금을 받고, 하차지를 안내하는 역할만 했던 버스 안내양이 최근에는 승객들의 말동무가 돼주거나 지역 관광 안내를 하는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더한 복고 콘텐츠는 같은 다른 환경속에서 살아왔지만 같은 시대를 경험하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친근함을 느끼고 결속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러니 인공지능 시대 없어질 직업에 함몰돼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원세연 지방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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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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