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6일 개헌안을 발의키로 예고한 뒤 청와대가 지난 20일부터 사흘간 개헌안에 대한 세부 내용을 공개하면서 정국이 시끄럽다.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이 회피하는 통에 대통령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청와대를 엄호하고 있는 반면 야당은 개헌이 아니라 개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개헌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 1년이 넘도록 손을 놓고 있던 여야로선 `뒷통수`를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들로선 뒤늦게 설왕설래하는 여야가 볼썽사납기만 하다.

청와대가 공개한 대통령 개헌안은 사회변화에 걸맞게 진전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몇몇 조항은 논란의 소지가 여전하다. 민주이념 정통성을 강화한 부분은 보수세력의 반발이, 국민소환제는 국회의 반발이 예상된다. 수도를 법률로 정한다는 조항은 행정수도의 헌법 명시를 주장해온 충청민의 염원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정권과 다수당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우려가 앞선다. 권력구조로 들어가면 사정은 더욱 암울하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손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대통령 4년 연임제를 제시한 청와대·여당과 분권형 대통령제 및 책임총리제를 요구하는 한국당의 거리는 너무 멀다.

물론 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 날짜를 천명했지만 반드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국회 주도 개헌을 강조해온 만큼 국회의 개헌 논의를 촉발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여야가 6월 지방선거와 동시 투표에 합의한다면 대통령의 발의를 철회할 수 있음을 청와대측이 내비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아무리 여소야대라지만 개헌국면에서 여당인 민주당의 존재감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개헌을 회피하는 야당을 견인할 책임과 역량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야당, 그 중에서도 자유한국당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개헌을 늦추거나 아예 없던 일로 미뤄놓고 싶은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대선 패배 이후 보수의 힘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의 개헌 논의는 득이 될게 없다. 문 대통령 여당, 그리고 국민의 압박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개헌을 회피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대로 끌려가면 보수 정치권이 정권을 되찾아올 일말의 기회까지 상실될 것이란 위기감이 더 큰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평가하는 6월 지방선거와 동시투표는 엄두를 내기도 두려운 일이다.

개헌의 방향은 제시됐지만 지금처럼 여야가 대치해서는 개헌은 이뤄지기 어렵다. 한국당 등 야당이 청와대와 여당의 압박에 버틸 수 있는 힘은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개헌안은 26일 발의된다 해도 국회 통과는 난망하다. 그렇다면 청와대와 여당은 한국당 등 야당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양보할 부분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대통령 개헌안이 한국당의 반대로 폐기된다면 한국당 등 야당은 궁지에 몰리겠지만 개헌은 물 건너가게 된다. 시기를 늦춰 재논의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개헌 동력이 한 번 상실되면 이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헌안 발의 이후 60일 이내에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으로 의결하고,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야 하는 규정상 여야가 개헌안에 손을 댈 수 있는 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다. 여야가 보는 눈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더라도 어떤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를 이제 결정해야 한다. 여야 합의로 국회 개헌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개헌은 성사되기 어려운 구조다. 명분에만 집착해 개헌의 기회를 무산시킨다면 정치권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김시헌 천안아산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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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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