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14,15~31절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모세는 하느님께 부르짖는다. 하느님께 부르짖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믿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사 백 여 년간의 노예 생활을 했다. 이 노예 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에서 들어난 그분의 권능과 자비에 의해서였다. 세계 최고의 군대를 가진 이집트에서 많은 재물까지 들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추격해온 이집트 군대에 겁먹은 그들은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탈출 14,12)라고까지 말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너희를 뒤따라 들어가게 하겠다. 그런 다음 나는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노예 상태로 부터의 해방인 이집트 탈출 사건이 주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듯이, 파라오 군대와의 전투는 하느님께서 몸소 싸우시는 그분의 전투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행방인 구원도 우리가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이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낮추는 행위이다. 이러한 믿음은 주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따르게 한다. 우리는 나를 비우고 내려놓는 순명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게 된다. 결국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그분께 모든 것을 되돌려 드리는 행위,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완고함이다. 완고함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거나 비우지 못하게 만든다. 나아가 파라오와 그의 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께 대항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탈출 14,28) 하느님께 대한 대항은 온전한 파멸을 초례할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항하는 적들을 파멸시키신 다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고대했던 분이시자(요한 8,56)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요한 1,45)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사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하라는 말씀이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그분의 나라가 오며,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는 이집트 탈출 사건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루카 4,18)내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인 이집트 탈출 사건을 우리 가운데 다시 재현하고 체험하는 길로서 주어진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 특히 십계명이다. 십계명과 성경 전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마태 22,37~39) 이집트 탈출 사건이 지향하고 있는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최종적인 해방은 우리가 사랑을 품고 사랑을 위해서 나 자신을 비우고 희생해 나갈 때 성취된다. 사랑을 위해서 십자가 위로 올라갈 때 참된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들어난 하느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상의 죽음에 이어 나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히 들어나게 될 것이다.(요한 13,31)

이집트 탈출 사건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경외의 행위인 영성(spirituality)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의 영성만이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고 살게 해주시는 영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영은(the Spirit) 우리가 모든 사건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희생하게 해주신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비우고 낮추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대한 불신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불신과 교만이 마음의 완고함을 낳아 물질이 되었던 권력이나 인기가 되었건 계속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축척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과도한 성장과 축척을 향한 급박하며 격정적인 움직임을 단순한 사회 현상으로 보기에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다. 오창호 신부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