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흐는 그곳] 28 세월을 머금은 그곳, 삽교읍

삽다리 공원에는 실물 전투기 2대가 전시돼 있다. 직접 올라가 볼 순 없지만 웅장한 모습에 압도된다. 전희진 기자
삽다리 공원에는 실물 전투기 2대가 전시돼 있다. 직접 올라가 볼 순 없지만 웅장한 모습에 압도된다. 전희진 기자
아직 땅이 굳기 전이다. 처마밑은 말라있지만 습한 기운이 서려있다. 전날 비가 온 탓인지 온통 회색빛이다. 흐린 날씨 때문에 더욱 그런 모양이다. 비록 비는 그쳤지만 `비오는 날의 수채화`같은, 혹은 `빗속에서`와 같은 곡이 떠오르는 이유다.

매서웠던 공기는 그나마 온기를 머금었다. 춥기보다는 서늘하다. 걷기 딱 좋은 날씨다. 낡은 느낌이 나는 곳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신도시를 벗어나 모처럼 낡은 거리를 찾는다. 아니, 어쩌면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릴 지도 모를 곳을 두 눈에 담으러 간다. 축축한 흙내음을 맡으며 삽교읍으로 떠났다.

삽교(揷橋)는 `섶다리`, 혹은 `삽다리`라는 단어가 변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이름의 유래는 실로 다양하다. 백제어로 붉다는 뜻의 `삽`자와 다리를 의미하는 `교(橋)`자가 합쳐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섶으로 만든 다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설화도 몇 개 있다. 옛날 삽교 근처에 살던 새댁이 친정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삽교천을 건너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섶을 엮어 다리를 만들고, 새댁을 어머니에게 가도록 만들어줬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1800년대 중반 흥선대원군이 남연군묘를 만들 때 행차하는 다리가 좁아 섶으로 다리를 엮어 삽교천을 건넜다는 이야기다. 종류야 어떻든 섶으로 만든 다리가 지명의 유래였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었던 만큼 삽교는 과거에 꽤나 번성한 곳이었다. 기름진 삽교평야에서 쌀도 많이 나왔을 뿐 아니라 사과를 비롯한 다양한 작물도 생산된 덕분이다.

길에서 만난 주민 박모(68)씨도 당시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는 "삽교역이 있던 주변은 번화가였어. 역사가 깊은 곳이지. 쌀도 많이 나오고 보부상이나 사람들도 많이 오가는 부자동네였어"라며 "근데 한 10년 전쯤에 역을 새로 지어 옮겨갔어. 예전만큼은 활기가 없어진 상황이여"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삽교역은 점심시간 맛집을 찾아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조용한 동네다. 낡은 간판과 건물만이 풍성했던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마을 초입에서 낡은 건물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골목골목을 누벼도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덕분에 걷기는 쉽다. 삽교읍의 트레이드 마크는 역시 삽교역이다. 지금이야 읍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래도 `삽교역이 있던 자리`라고 하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역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삽다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아기자기한 모습에 괜시리 마음이 끌린다. 공원 내부에는 장승과 윤봉길 의사 독립운동 기념비, 시계탑 등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특산품인 사과를 형상화 한 의자에서는 사진을 찍기 좋다. 의자 맞은 편에는 철로 만들어진 대형 꽃밭이 있다. 셔터를 누르는 대로 그림이 나온다.

가장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공원 안에 있는 실물 전투기 2대다. `하늘의 도깨비`라고 불린 F-4E와 초음속 전투기 F-5A/B가 전시돼 있어서다. 나라사랑 정신을 잊지 말자며 모두 공군에서 대여한 것들이다. 실물인 만큼 크기에 압도된다. 직접 올라가 볼 순 없지만 웅장한 자태에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공원 둘레 가로수에는 장항선 복선전철 확정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서해선 복선전철과의 연결 고리 덕분이다. 주민들은 서해선 복선전철과 장항선 복선전철이 연계될 경우 지역 경제에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서해선 복선전철 삽교역사가 신설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지 모른다는 기대감 역시 크다.

주민 최모(71)씨는 "삽교역사가 신설된다고 당장은 큰 효과가 없을 거여"라며 "옛날만큼은 아니어도 분위기는 더 좋아지지 않겄어?"라고 말했다.

공원을 뒤로 하고 맞은 편 도로 골목으로 넘어간다. 건물 층고가 낮은 동네다 보니 키 큰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노란색 숙박시설이다. 1층에는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겉모습이 낡아서 꽤나 인상적인 모습이다. 골목으로 돌아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온다. 좁은 골목을 걷는 맛이 쏠쏠하다. 골목에 놓여 있는 색 바랜 간판은 세월을 머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늘 그곳에 있었던 것만 같다.

기왕 걷는 김에 삽교역까지 가보기로 한다. 주의할 점은 걷기에는 다소 멀고, 또 차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가깝다는 점이다. 너무 덥거나 추운 날이라면 분명 쉽지 않은 길일테니 날씨가 좋을 때 걷는 것을 권한다.

역사 주변에는 차도, 인적도 드물다. 인근에는 산단이 들어서 있다. 늙은 개 한마리가 고요한 도로 옆에 앉아 자동차를 바라본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삽교역은 역명이 한번 바뀐 적이 있다. 73년에 `수덕사역`이라는 이름을 썼다가 80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역사는 작지만 역 전체 규모로 보면 생각보다 큰 곳이다. 아마 거대한 컨테이너 야적장이 있기 때문일테다. 장항선에서 거의 유일하게 컨테이너를 취급하는 곳이다 보니 야적장의 크기만 1만 6500㎡에 달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역사 건물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전면을 유리가 둘러싼 형태다. 한옥 모양이었던 옛 역사와 달라 푸근한 맛이 살지는 않는다.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에 지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의 멋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용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삽교역은 그래도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비록 KTX가 아니라도, 다른 지역을 찾는 지역주민들에게 기차는 여전히 귀중한 이동수단이다. 모습은 달라졌어도, 그리고 위치가 바뀌었어도 삽교역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여전히 크다. 새로운 역이 생긴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흥분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역사(驛舍)는 삽교읍의 역사(歷史)를 새로 쓸 지도 모른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이곳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또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까. 달라질 삽교읍이 기대되는 이유다. 전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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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다리 공원에는 실물 전투기 2대가 전시돼 있다. 직접 올라가 볼 순 없지만 웅장한 모습에 압도된다. 전희진 기자
삽다리 공원에는 실물 전투기 2대가 전시돼 있다. 직접 올라가 볼 순 없지만 웅장한 모습에 압도된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골목으로 돌아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온다. 좁은 골목은 걷는 맛이 꽤 쏠쏠하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골목으로 돌아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온다. 좁은 골목은 걷는 맛이 꽤 쏠쏠하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골목으로 돌아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온다. 좁은 골목은 걷는 맛이 꽤 쏠쏠하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골목으로 돌아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온다. 좁은 골목은 걷는 맛이 꽤 쏠쏠하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내 골목에 놓여있는 오토바이들. 낡은 모습이 묘하게 거리와 어울린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내 골목에 놓여있는 오토바이들. 낡은 모습이 묘하게 거리와 어울린다. 전희진 기자
삽교역 건물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전면을 유리가 둘러싼 형태다. 전희진 기자
삽교역 건물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전면을 유리가 둘러싼 형태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근처는 인적도, 차량도 드물다. 늙은 개 한마리가 조용히 도로를 바라보고 있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근처는 인적도, 차량도 드물다. 늙은 개 한마리가 조용히 도로를 바라보고 있다. 전희진 기자
예산읍 삽다리 공원에는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곳이 많다. 철로 만들어진 꽃의 모습. 전희진 기자
예산읍 삽다리 공원에는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곳이 많다. 철로 만들어진 꽃의 모습. 전희진 기자
삽교읍 골목에 놓여있는 낡은 간판은 세월을 머금고 있다. 전희진 기자
삽교읍 골목에 놓여있는 낡은 간판은 세월을 머금고 있다. 전희진 기자
예산읍 삽다리 공원에는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곳이 많다. 철로만들어진 꽃의 모습. 전희진 기자
예산읍 삽다리 공원에는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곳이 많다. 철로만들어진 꽃의 모습. 전희진 기자

전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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