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에 관한 일화이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輪對, 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박영규, 2014).

이런 기록도 있다. "무기 제작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던 신숙주가, `주상이 숭상하는 것을 만인이 숭상하는 바이니 주상께서 무(武)만 숭상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무(武)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라고 문종에게 말하자, `군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라며 일축했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부드러움과 강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의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은 9번이며 별칭은 조정자이다. 그의 성격특성은 나태와 참여라는 격정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소속된 집단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다. 관대하고 이타적이며 어려움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려 한다. 집단 내 구성원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 내고자 하는 훌륭한 중재자이다.

그는 1414년(태종 14) 대군 시절이던 세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1421년(세종 3)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37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즉위하기까지는 8년의 대리청정 기간이 있었다. 세종이 재위 24년 무렵부터 자신의 신병으로 인하여 효율적인 왕권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출중한 능력을 갖춘 부친을 후견인으로 두고 이론과 실제를 아우른 제왕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세종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위하여 첨사원(詹事院)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관료들 배치하여 정무를 지원토록 하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한 이는 문종이었다. 그는 대리청정과 재위 기간에 걸쳐 부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충실히 수행했다.

"4군 6진의 북방 정비를 완료했으며, 군제를 개편하고 병력을 증강했다. 화차 같은 신병기도 직접 설계했으며, 세종 대에 이뤄진 화포의 규격화 및 법제화, 부대 운영과 인원수의 결정 등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과 과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나무위키, 조선의 역대국왕).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서적을 편찬케 하고,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편찬하라 명하기도 했다.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과 역수(曆數) 및 산술에도 정통했고, 서예에도 능했다.

그는 형제들간의 우애도 돈독해서 동복, 이복을 가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심지어는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겨 대신들의 상소가 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다고 한다. 9번 유형답게 침착하고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그는 원래 병약하기도 했지만, 1446년 모친인 소헌왕후의 사망에 이어 1450년에 세종이 승하하자 두 번의 상사를 치르면서 건강에 치명적인 부담을 주었고 재위 2년 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했다. 현상진 대전시민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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