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상처 대한청소년 개척단] 中 헝크러진 삶

정부는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녀 125쌍의 합동결혼을 강제로 시켰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정부는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녀 125쌍의 합동결혼을 강제로 시켰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형제를 두고 있다는 정화자(76·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씨.

대전에서 공장에 다니던 정 씨가 대한청소년 개척단에 온 것은 1962년이다.

월급을 두 배로 준다는 말에 속아 차량에 오른 것이 정 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정 씨는 억울해서 눈물만 나온다고 했다.

정 씨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강제 결혼을 했는데, 그 남편은 개척단 생활을 하면서 다리를 다쳤으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40여 년 전 이미 세상을 등졌다"며 "억울한 생각 밖에 없고,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눈물 밖에 안 나온다"며 울먹였다.

정부는 정 씨처럼 속이거나 강제로 잡아온 여성들을 대한청소년 개척단원들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얼굴도 모르는 남녀가 그날 첫 대면을 하고 결혼을 한 것이다.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125쌍이 합동결혼식을 했고, 이듬해인 1964년 11월 24일 225쌍이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2차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모두 350쌍이다.

그러나 2차 합동결혼식은 인원이 모자라 1차 결혼식을 올린 이들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결혼식을 마친 이들 중 일부는 서산으로 내려오면서 도망가기도 했다고 개척단원들은 증언하고 있다.

대한청소년 개척단 단원 등에게 간척지 가배분권을 양도받은 경작인들의 모임(40명)인 `무상분배추진위원회` 정영철(77·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위원장은 "20대 청춘을 사기 당했다"고 했다.

강제 수용과 고된 노동, 인권탄압 등 대한청소년 개척단은 한 마디로 딴 나라였다.

정 위원장은 "개척단원들이 맞아서 죽거나 굶어서 영양실조로 죽는 등 눈으로 본 것 만해도 많은데, 사람이 죽어나가도 왜 죽었는지 물어본 사람도 없고, 파출소에서 나와 본 적도 없었다"며 "가족들이 수소문해 경찰과 같이 찾아오면 정문에서 `그런 사람 없다`고 하고, 쫓아내면 그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개척단원들에게 생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마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이었지만 삼엄한 감시망을 뚫는 것은 곧, 죽음을 감수해야 할 용기였다.

김세중(69·서산시 인지면 모월2리) 씨는 20여 년 전 돌아가신 처 작은아버지에게서 들은 개척단원 도망자들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처 작은 아버지말로는 그곳을 빠져나온 개척단원들이 빌려간 것은 `옷`이라고 했다.

김 씨는 "처 작은 아버지 집에 어느 날, 한 밤 중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면서 "개척단원들이 입는 옷은 군복도 아닌 것이 그 당시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옷으로, 밖에 나가면 금방 발각이 되기 때문에 옷을 빌려 입고 가면서 `평생 은혜 잊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처 작은 아버지 집에 찾아온 개척단원들이 두 명은 더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이들처럼 도망에 성공하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망치다 걸려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게 개척단원들의 더듬기 싫은 기억이다.

현재 서산시희망공원 납골묘 무연총에는 정부에 의해 헝클어진 인생을 살다간 대한청소년 개척단원들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최근 이곳을 찾아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밝혔다.

국가가 놓은 덫에 걸려 자기 결정권 없는 강제 수용소에 갇혀 아무런 대가 없는 모진 노동과 인권유린 등을 당한 대한청소년 개척단원들의 한 많은 삶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는 당시 강제노역에 동원된 1세대 개척단원 11명이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관희·박계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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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녀 125쌍의 합동결혼을 강제로 시켰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정부는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녀 125쌍의 합동결혼을 강제로 시켰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정부는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녀 125쌍의 합동결혼을 강제로 시켰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정부는 1963년 9월 26일 개척단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녀 125쌍의 합동결혼을 강제로 시켰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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