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상처 대한청소년 개척단] 上 대한청소년 개척단은 누구인가

정부가 1961-1966년까지 5년간 사회명량화사업 일환으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만든 가운데 개척단원들의 강제 수용소인 일명 형설촌이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정부가 1961-1966년까지 5년간 사회명량화사업 일환으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만든 가운데 개척단원들의 강제 수용소인 일명 형설촌이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1961년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거리의 부랑아 등에게 갱생의 기회를 제공한다며 사회명랑화사업의 일환으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일원에 1700여명을 집단 수용했다.

정부가 일명 `대한청소년개척단`들에게 국유지인 폐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시키면서 자행한 강제 수용과 노역, 인권유린 등은 상상을 넘는다.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이들과 관련된 청원이 15건에 이른다.

`대한청소년 개척단`이 1961년 11월 14일부터 1966년 9월 1일 공식 해체될 때까지 5년간 개척단원들의 생지옥 같은 삶을 돌아보고, 이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3편에 나눠 보도한다.

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우범자, 출감자, 윤락녀 등을 사회로부터 강제로 치우는 사회명랑화사업을 시작한다. 이들에게 이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중에는 정부의 방침과는 다르게 무고하게 잡혀온 이들도 상당수였다.

당시 학교 가다가 잡혀오거나 길거리에서 눈에 띈다고, 통행금지에 걸렸다는 등 일명 `후리가리(경찰이 실적을 위해 강제로 사람을 잡아들인다는 속어)`로 잡혀온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10살 안팎의 어린이들도 후리가리 대상이었다.

정부는 1961년부터 이들 1771명으로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조직했으며, 개척단원들은 초기엔 거처가 없어 야산에 땅굴을 파거나 천막을 치고 1년 정도 살았다.

이들은 군대와 같이 소대, 중대, 대대, 연대로 구분, 관리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감시하는 감시원 60명(20명씩, 3교대)도 있었다.

감시원의 철저한 감시, 외부와 차단된 채 강제 수용소(일명 형설촌)에 수용된 개척단원들은 국유지인 폐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했다.

1950년대 초 염전 조성을 목적으로 그 당시 전매청에서 제방을 축조했으나 그 후 폐염전으로 방치해 오던 중 1961년 정부가 이들에게 바닷물이 드나드는 이 폐염전을 농지로 개간하는 일을 시킨 것이다.

이들의 농지 개간은 고달픔과 배고픔 그 자체였다.

비탈진 야산을 삽과 곡괭이로 파헤치고, 지게가 없어 등으로 돌과 바위를 날라 갯벌을 손수레와 삽으로 평탄하게 만들어 농지를 한 뼘 한 뼘씩 일궈나갔다.

돌이 부족하면 4㎞ 거리의 인근 도비산까지 가서 돌을 짊어지고 가져오는 일을 하루에 4-5차례 반복하는 등 강제 노역의 강도는 셌다.

고된 노동에 비해 식사는 하루 두 차례 김치도 없이 나오는 보리밥이 전부, 당시만 해도 흔하던 개구리와 뱀, 쥐, 두더지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고 이들은 증언한다.

개척단 피해자들에 따르면 생지옥에 놓인 개척단원들은 감시원의 눈을 피해 도망가다 걸려 맞아죽거나 살인적은 노동을 버티지 못해 병에 걸려 죽는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어 나갔다.

이들은 1961년부터 공식 해체된 1966년까지 5년 간 농지와 웅덩이, 도로, 수로 등 321㏊를 개간했다.

개척단원 김재권(76·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씨는 "1961년 개척단에 왔을 당시 개척단 자리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산이었는데, 그곳에 터를 닦고 땅굴을 파 6개월 이상 지냈다"며 "농지 개간도 변변한 장비가 없어 삽과 곡괭이만으로 모진 인권탄압 속에 전부 사람 인력으로 농지를 만들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정부에 의해 50년 넘게 `부랑아`로 낙인찍혀 한 푼 받지도 못하고 강제노역과 인권유린 등으로 청춘을 날려 보낸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억울한 사연이 언론의 관심 속에 수면 위로 떠올라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다. 정관희·박계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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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961-1966년까지 5년간 사회명량화사업 일환으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만든 가운데 개척단원들의 강제 수용소인 일명 형설촌이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정부가 1961-1966년까지 5년간 사회명량화사업 일환으로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에 대한청소년 개척단을 만든 가운데 개척단원들의 강제 수용소인 일명 형설촌이다. 자료 사진 소장처=충남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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