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빈 시인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인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왜 우리는 위 글들에 대해 한국 문학사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을까"이다. 작가들의 행적은 둘째로 치고 작품의 내용을 보면 해양문물 특히 일본에 경도된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 근대 지식인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읽었기 때문이었다.

"양인의 옷이라고 반드시 내 것보다 나은 것은 아니며, 내 옷 입은 꼴이 반드시 양인보다 자리가 잡히지 아니함은 아니로되, 자연히 양인은 부귀의 기상이 있고, 나는 빠들빠들 양인의 흉내를 내려는 불쌍한 빈한자의 기상이 있는 듯하여 수치(羞恥)의 정이 저절로 생김이로소이다"

이 글은 이광수가 쓴 1910년 초 블라디보스토크 기행문 중 일부인데, 당시 조선 엘리트의 한없는 서양문물에 대한 동경과 자기 비하를 또한 읽을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 문단을 생각하면 더욱 답답하다. 1992년 제1차 한일문학심포지엄(한일 작가회의)을 개최한 이후 언제부턴가 일본 소설이 한국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현재까지 한국의 소설들은 일본 독자들에게 거의 외면당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유명한 소설가의 표절문제가 쟁점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필자는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주장했던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해서 더욱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다수의 문학인들은 우왕좌왕하는 듯했다. 한국의 최고 양대 문예출판사를 오고가며 소설을 낸 그의 경력 때문일까 그 소설가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컸고 조심스럽게 비판하는 목소리는 작았다.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데 문단에서의 일부 힘(?) 있는 비평가들은 "괜찮다" 혹은 "어찌됐든 조심했어야 했다"라는 말만 되뇌고 있었다.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것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많은 문인들이 언론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와 문학의 위기를 말해 왔다는 것이다. 시스템과 운영자가 문제인데, 그 운영자가 소비자인 독자들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처럼 필자는 들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문학의 위기는 글 쓰는 사람들이 자초했던 것이다. 우리 소설보다 일본 소설을 선택했던 독자들의 시각은 정확했다. 결국 문학은 창작도 중요하지만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시스템에서 최상위 결정권자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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